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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재의 골짜기 /로스트 볼 /새벽과 색깔들의 꿈 /밤식빵의 저녁 /빛멍 /시간의 세 가지 형태 /웨이터 /물칸 /자귀나무 그늘에 찔려 /시나몬에 대해서라면 /도형의 중심 /사라진 입술과 두 개의 이야기

1
삭흔 /슈가 포인트 /홀로그래피 /숲의 검은 뼈 /롬곡 /멀어지는 포도 /붉은 그네 /여행하는 열매 /매직아이 /사라지는 동화 /드림캐처 /살구 /머무는 물과 나무의 겨울 /회전 숲

00
종이를 만지는 사람 /당분간 달콤 /물에 비친 나무는 깨지기 쉽습니다 /인그로운 /목련 그믐 /하이람 /검은 사과 /약속을 내일로 미루어도 되겠습니까 /순간의 모서리 /디자이너 /로아 /겨울의 목차 /깊어지는 문 /눈빛이 액체라면

01
귀가 열리는 나무 /리플레이 /우리는 아마도 이런 산책을 /물의 비밀들 /생몰 /닫힌 문 너머에서 /난파선 위를 걷는 /겨울 가지처럼 /정글짐 /감염 /다족의 밤 /블랙 베이비 /타오르는 바퀴 /01

해설 생장기生長記·소유정
저자 소개
저자 : 이혜미
1988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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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발화되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 숲을 이루고
내면으로 파고드는 여행을 시도하는 화자

나는 당신이 내버렸던 과실, 창백하게 타들어가던 달의 씨앗, 단단한 씨앗에 갇혀 맴돌던

[……]

가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아마도 먼 나라에서 훔쳐 온 것 말라가는 뿌리를 휘저어 당신에게서 멀어질 거야 희고 외로운 열매를 맺겠지 오래전 함께 스쳐 지나갔던 풀숲에서

나는 거꾸로 자라는 식물, 더러운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낯선 구석이 될 거야 우주의 품에서 조금씩 삭아가는 이 작고 얼룩진 행성처럼

―「로스트 볼」 부분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소유정은 발화하지 못하고 “그저 말을 삼”킴으로써 내부에 쌓인 말들을 ‘씨앗’이라고 말하며, 이혜미의 직전 시집 『뜻밖의 바닐라』에는 그 씨앗들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창백하게 타들어가던” 씨앗이었던 나는 이번 시집에서 “위독한 가지”(「겨울 가지처럼」)로 자라난다. “마음이 내쳐진 곳마다” 돋아나는 “날카로운 파편”처럼, “잎사귀의 무늬로 떠오르던 상처”(「시간의 세 가지 형태」)처럼 가지를 뻗고, “희고 외로운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커가는 식물을 “거꾸로 자라는 식물” “거꾸로 서 있는 나무”(「머무는 물과 나무의 겨울」)라 칭한다. 이 뒤집힌 식물의 이미지는 수면 위에 비친 나무, 거울처럼 반사된 나무를 바라보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혜미의 시에서 그간 서로에게 스며드는 액체, 혹은 화자의 세계를 대변하는 사물로서의 액체가 얼마나 중요한 소재였는지 떠올리게 된다. “안으로 흘러들어/기어이”(「겨울 가지처럼」) 고인 물이 내 안에 온몸 가득한 멍으로 남아 있다. 나무가 뿌리 내린 “더러운 물속”, 그 물에 비친 나무는 화자의 아픔, 이는 내면의 병증이 반사된 모습이자 시적 화자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우주를 뒤집었을 때
말들이 쏟아지고 비로소 시작된 ‘나’의 이야기

심장을 보려 눈을 감았어. 부레의 안쪽이 피투성이 시선들로 차오를 때까지. 어항을 쓰고 눈물을 흘리면 롬곡, 뒤집힌 우주가 안으로 쏟아져 내렸어.

행성의 눈시울 아래로 투명하게 부푸는 물방울처럼, 빛을 질식하게 만드는 마음의 물주머니처럼. 흐르는 것이 흘리는 자를 헤매게 한다면 어떤 액체들은 숨은 길이 되어 낯선 지도를 그리겠지.

[……]

우주를 딛고 일어서는 힘으로
발끝이 둥, 떠올랐어

―「롬곡」 부분

내면에 비친 나무를 계속해서 응시하던 화자는 이제 “자신 안의 망령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의 여행”(「홀로그래피」)을 끝내기로 한다. 내 안에 갇힌 채 울창한 숲을 이뤘지만 나의 밖으로 발화되지 못한 나뭇가지들을 밖으로 끌어내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수면에 비친 나무를 깨뜨리는 방법은 꽤 간단하다.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물 위에 반사된 것들은 흩어지기 때문이다. 이혜미 시가 그간 중요하게 다뤄왔던 안팎을 뒤집는 행위가 바로 이 지점에서 수행된다. 화자는 과감하게 자신의 세계를 뒤집고 “뒤집힌 우주가” 흘러나오도록 한다. 이혜미의 시에서 이러한 전복이 그간 “타자와의 교감과 결합을 추구하는 시도”(오형엽)로 사용되었다면, 이번에는 ‘너’ 없이 ‘나’ 홀로 나의 세계를 뒤집어보는 행위로 나아간다.
그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의 위아래를 바꾸고 안에만 머무르고 있던 말들, “고인 진창”이 나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고여 있던 물을 흐르게 하면 나는 눈물을 흘릴 만큼 아플 수도 있겠지만, 액체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낯선 지도를” 그릴 것이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내 안의 것들이 새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몸의 가장 어두운 뒷면” 나의 “닫힌 눈꺼풀”(「닫힌 문 너머에서」)을 뜬다. 빛의 자격을 얻은 화자의 시선은 “아직 흘러나오지 못한 말들을 비출 것이다. 눈이 부실 만큼 반짝이는 말들을 시인은 더 이상 삼키지 않고, 감추지 않고 내보일 것이다”(소유정). 관계 속에서가 아닌 홀로의 모습으로 우주를 딛고 둥, 떠오를 시간이다.

-

시집 속으로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원경」 부분

서로를 헤집던 눈빛이 부서져 휘날릴 때 네가 선물한 골짜기에 누워 깊숙한 윤곽을 얻는다 먼 곳에서 그을음을 퍼다가 쏟아놓고 떠난 사람, 흉한 마음을 모아둔 유곡으로 들어서면 검은 꽃과 삭은 과일들이 가득했지

어스름을 뒤집어 여명을 꺼내면 가라앉는 골짜기마다 환한 어둠들이 차올랐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워 깨어져야만 안심이 되는 유리잔 같았지
―「재의 골짜기」 부분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빛멍」 전문

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 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치면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찾아. 떠올린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홀로그래피」 부분

썰물처럼 마음이 빠져나간 곳에
깨진 유리들이 반짝이며 수북해질 때

떠올리고
떠올랐지

입술의 반경을 미리 겪는 줄도 모르고
움켜쥔 그넷줄이 핏빛으로 번져가는 것도 모르고
―「붉은 그네」 부분

깊숙이 흐려져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입체를 가질 수 있다고

잠겨드는 페이지를 걸으며
처음 보는 무늬를 짐작하는

서로의 눈 속을 걷던 시간이었다

―「매직아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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