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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로라를 기다리고
거미줄
서로에게 좋은 일
개미
최초의 부고
유실물
황벽나무 노란 속껍질

해설 상처라는 희망 | 전성욱
작가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서정아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풍뎅이가 지나간 자리」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이상한 과일』 『오후 네 시의 동물원』이 있다. 2024년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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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2024년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한 서정아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서정아는 이번 소설집에서 가족 제도, 사랑의 환상을 집요하고 정밀하게 탐문한다.

「거미줄」은 가족이 배타적인 동일성의 악력을 행사하는 어떤 이념의 결사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거미줄은 거미의 ‘집’이면서 동시에 먹잇감을 낚아채는 ‘덫’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이 안전한 집이라고만 여겼을 뿐 먹잇감을 노리는 덫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집(삶)이면서 덫(죽임)이기도 한 ‘거미줄’은 온전하고 안락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통해서 그 내부의 구성원들을 규율하고 약탈하는, 요컨대 가족이라는 체계의 역설적인 이중성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상징이다.

체계는 정태적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복잡한 배치와 생성하는 관계들의 연결로써 작동하는 어떤 망이며 흐름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역시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와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과정이기 때문에, 고정된 하나의 정체성으로 매끄럽게 규정될 수 없다. 요컨대 여성을 여성으로서 규정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체계가 조장하는 정체성의 정치일 뿐이다. 여성은 하나의 실체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들로서, 저 배타적인 동일성의 체계가 압박하는 가운데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유연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렇게 이름을 빼앗긴 익명의 존재로 환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상징적으로 말살하는 폭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 간의 서로 다른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는 「서로에게 좋은 일」과 「개미」는, 그 차이의 선명한 부각 자체로 바로 그 가부장적인 동일화의 폭력을 문제화한다. 이 두 소설에서 그 차이는, 특히 계급(계층)적인 것으로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제휴가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어떻게 균열내고 또 분열시키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여성들 간의 고유한 차이들을 그들이 보유한 자산 역량의 격차로 환원하여 분류함으로써,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대립 속에서 적대와 적의의 정동을 발생시키고, 결국은 모종의 불신과 함께 서로를 등 돌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로라를 기다리고」는 사랑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성적인 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언명처럼, (우리가 기다리는) ‘오로라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화자인 서인은 불어로 인연이라는 뜻의 ‘Lien’이라는 이름의 음악감상실에서 인경을 처음 만났다. 인경은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으며 차이들을 무시하거나 단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읽어낼 줄 아는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던 그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고, 몇 달 후 그의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 인경이 죽었다는 것과, 그동안 그가 말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종의 애도를 위한 것이었을까. 서인은 인경, 아니 그 사랑의 실존에 대한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혼자서 노르웨이로 여행을 떠나왔다. 오로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 여행은 실존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의 충격을 주었던 사람(사랑)의 실체에 대한 번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서인은 노르웨이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꿈과 몽상과 잡념”에 시달리고,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에도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현실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낀다. “잘 안다고 자신했었는데,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아는 것은 나라고 확신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 안다고 여겼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싶었다.” 작은 차이를 무시하는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었던 그 사랑은, 알고 보니 현전하지 않는 흔적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을 배반당한 서인은, 현상 너머의 실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문에 휩싸인 채, 기어이 오로라를 찾아서 떠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인경이 했던 이 말을 기억하면서. “아름다운 건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잖아. 그걸 알면서도 들끓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자꾸 욕망하게 되는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형이상학의 치명적 매혹, 그 환상의 유혹에 빠져든 것은 서인 본인이었다.

「황벽나무 노란 속껍질」, 「최초의 부고」, 「유실물」은, 세속의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능한 희망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황벽나무 노란 속껍질」의 여자 역시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누구에게도 전혀 이해받지 못했고, 그래서 치유되지 못한 채 오래 방치되어 있다. 그런 여자 앞에 불현듯 나타나 살고 싶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 사람이 무경이다. 그는 이야기를 채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어둑시니를 만나거든 올려다보지 말고 내려다보라고, 그리고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러면 결국 그것이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무경의 이야기에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무경의 언어는 엄마의 술주정이나 상도의 욕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자기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지만, 지금 여자의 현실에서는 무경의 존재와 그 언어에 닿기 어려웠다. “그의 언어에 닿고 싶고, 그것은 너무나 먼 곳에 있고,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자는 고대의 불경이 황벽나무 노란 속껍질 속에서 변질되지 않고 천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처럼, 그 무해한 숙성의 시간이 갖는 힘을 깨닫는다. 여자는 무경이 떠나며 선물로 준 그의 책을 통해서, 어둑시니를 이겨내고 스스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힘을 기르리라 다짐한다.

「유실물」은 파국을 암시하는 종말론적인 묵시록의 분위기 속에서 간절한 구원의 열망을 그려낸 소설이다. 지아와 조는 상실의 아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책에서 진통(鎭痛)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둘은 같은 독서 모임에서 책을 읽다가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지아는 고통스런 기억의 원체험을 중층적으로 겪었고, 몸에 담뱃불을 지지는 자학을 통해서야만 겨우 안정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병리적인 주체이다. 조는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겪고 전역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을 책임져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서 살고 있다. 지아와 조, 상실과 결핍이라는 공통의 상처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은, 교감과 공감이라는 소통의 힘으로써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죽음의 충동을 삶의 의욕으로 반전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의 소통에서 소외되어 상처받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가난하고 늙은 여자(할머니)의 말을 신뢰하지 못했고, 절실한 그 예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히 세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역시 그들마저도 그렇게 무신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작은 차이를 알아채는 그 세심한 인식의 역량이란 구원의 힘이기도 하다. 결국 예언처럼 폭우의 재난이 닥치지만, 구조를 요청하는 지아의 연락은 조에게 가닿지 못한다. 뒤늦게 연락을 확인한 조는 상실의 수난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본 사람이기에,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겠다는 의욕을 갖고 지아를 구조하러 달려간다.

자기에게 몰두하다가 유일한 안식의 자리가 되어주었던 진경을 잃어버린 여자(「거미줄」), 계급적인 차이의 안락함 속에서 보연을 거부해버린 수진(「서로에게 좋은 일」), 표면으로 이면을 속이고 은폐하려 했던 유선의 그 계급적 욕망이 결렬시켜버린 경주와의 만남(「개미」), 그리고 마침내 그런 형이상학의 환상에서 깨어나 지금의 현실을 응시하게 되는 서인의 여정(「우리는 오로라를 기다리고」). 무경과의 만남을 통해서 희망의 도주로를 발견해낸 여자(「황벽나무 노란 속껍질」), 사랑이란 아니 모든 만남이란 어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소통의 결실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선아와 재이의 관계(「최초의 부고」). 그리고 재난의 위기 속에서 자기들의 부주의한 실수를 깨닫고, 상처 받은 자들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서 드디어 또 다른 희망의 새날을 기대할 수 있게 해주는 지아와 조(「유실물」). 상처의 원체험을 애도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가엾은 자기의 상(像)에 고여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상처의 병리적 증상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취약한 주체는 그 상처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해체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이해받지 못했다는 끈질긴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마침내 스스로를 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들마저 이해해줄 수 있는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정아의 소설은 저 공고한 상처의 기원을 파고들어가, 그 병리적인 환상을 떠받치고 있는 정신의 틀(형이상학)을 해체하려고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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