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지 못한 죽음들까지
끝나지 않은 고통의 이야기
‘제노사이드’란 특정 집단을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죽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말로는 보통 집단 학살 또는 인종 학살이라고 합니다. 제노사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국적,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을 향한 말살 의도와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 보니 외려 한 국가나 민족 안에서 벌어지는 학살,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지는 강압 행위 등에는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곤 합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이라는 도시의 시민들을 몰살한 난징 대학살, 캄보디아 지도자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벌인 킬링필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시민들을 무차별 공격한 사라예보 포위전 등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이 제주 사람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제주4?3도 그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집단 학살이 얼마나 무겁고 명백한 국제 범죄인지 알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과 탄압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사람에게 낯선 용어이고, 이러한 논의도 부족한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홀로코스트나 르완다 대학살처럼 제노사이드로 인정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사건의 이름이 제노사이드이든 아니든 어떤 곳에 집단적인 죽음이 있었고, 그곳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같은 비극을 막고 학살이 벌어진 땅들의 슬픔이 마르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책 속에서
난징 대학살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와 일반 시민을 닥치는 대로 죽인 사건을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악명 높은 것이 바로 100인 목 베기 시합입니다. 일본군 장교 2명이서 누가 더 빨리 중국인 포로 100명의 목을 베는가를 겨룬 것이죠. 놀랍게도 이 시합은 일본 신문에 “믿을 수 없는 기록”, “106명 대 105명으로 두 소위, 연장전에 들어가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_ 1장 〈중국, 난징 대학살〉 19쪽
그들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여러 나라에서 여성을 데려와 ‘위안부’를 운영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입니다. 군인들이 성병에 걸리는 것을 막고 일본도 다른 나라의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리하여 중국 곳곳에 위안소가 만들어졌습니다. 난징에만 40개가 넘는 위안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성이 강제로, 또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여성도 있었습니다.
_ 1장 〈중국, 난징 대학살〉 21쪽
르네 카생은 〈세계 인권 선언문〉의 초안을 만드는 데 참여한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유대인입니다. 친척 29명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잃은 그는 인권이 짓밟히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지 초안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마음껏 말하고 종교를 가지며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훗날 〈세계 인권 선언문〉에서 이 내용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문〉을 만들게 된 계기는 홀로코스트였지만, 그 교훈은 특정 국가와 민족만이 아닌,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인류 전체가 꼭 지켜야 할 원칙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_ 2장 〈독일, 홀로코스트〉 56~58쪽
다랑쉬 동굴 역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챈 토벌대는 다랑쉬 동굴 안으로 총을 쏘아 댔습니다. 두려웠던 사람들은 더 깊은 굴속으로 들어갔겠지요. 그러자 토벌대는 동굴 안으로 불을 지핀 뒤, 연기로 점점 가득해지는 동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곳을 발견했을 때 동굴 안의 사람들은 땅속에 코를 묻거나 손으로 땅을 파다가 죽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_ 3장 〈한국, 제주4·3〉 78쪽
예비 검속으로 잡혀가 섯알오름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은 6년이 지난 뒤에야 가족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신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나뭇잎, 옷가지 등과 함께 썩어 버려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시신을 한데 모아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웠습니다. 비석의 이름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했습니다. 100명이 넘는 조상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한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_ 3장 〈한국, 제주4·3〉 84쪽
학살을 부채질한 것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는 방송이었습니다. 후투족이 장악한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하루 종일 투치족을 헐뜯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습니다.
“투치족을 죽여라. 그들은 바퀴벌레이다. 당장 내 이웃에 살고 있는 투치족을 찾아내어 죽여라.”
_ 4장 〈르완다, 아프리카의 눈물〉 101쪽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르완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마체테를 사들이는 데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죽이는 데 쓴 돈을 갚으라니 부당한 것 아니냐고 세계 각국에 외쳤지만 외면당했습니다. 돈을 빌려준 프랑스 역시 침묵했습니다. 결국 르완다 사람들은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_ 4장 〈르완다, 아프리카의 눈물〉 106쪽
만약 오스만 제국이 먼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 어땠을까요?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강대국들이 모여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입을 모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인류가 제노사이드란 명백한 범죄이고 잔혹한 행위라는 것을 인식했다면요? 어쩌면 유대인을 향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_ 7장 〈아르메니아, 메즈 예게른〉 186~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