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눈부신 사랑의 기록자’ 김연덕이 불러온
옛집과 유년의 애틋하고 강렬한 기억
가볍고 경쾌한 소시집으로 사랑받았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이 Vol.10부터 정규 시집으로 거듭났다. 한층 더 풍성해진 볼륨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의 쉰네 번째 시집은 김연덕의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이다.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는 서른 편의 시와 에세이 한 편, 그리고 환한 눈으로 시집을 읽어내는 평론가 정기석의 작품해설이 실려 있다.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며 시작된다. 시인의 ‘오래된 집’은 애틋하고 강렬한 유년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태어나서 처음 밟은 눈, 어린 시절 키웠던 강아지, 할머니의 방에서 몰래 훔쳐보던 브로치, 할아버지와 함께 시청한 NHK 스모 경기……. 옛집의 문을 열자 단박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시인은 빛바랜 기억을 마치 어제 겪은 일인 양 생생하게 살아내며 “눈밭의 맹렬한 환함”과 “강아지들의 정돈된 천국”, “브로치들의 광채”와 스모 경기의 “빛나고 괴로운 장면”을 기록한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시인 김연덕, 그의 시는 언제나 사랑으로 빚어져 있다. 첫 번째 시집『재와 사랑의 미래』에서 투명하고 깨질 듯한 사랑의 얼굴을 예리하게 조각하고, 두 번째 시집『폭포 열기』에서는 수치심을 딛고 나아가는 사랑의 열기를 뿜어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집’이라는 형태의 사랑을 건축하여 자신이 만든 문을 열고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 오래 “공실이었던” 옛집. 시인은 불을 켜고, “산 전체에 난방을” 틀고 “기억의 감각 속에서 온기가 희미한 있음으로 존재”(정기석)하는 것을 느끼며 그 온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 사랑을 기록”해야 하는 것만이 시인의 숙명인 것처럼. 그리하여 유년의 옛집은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된다. 김연덕의『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비어 있던 집의 오랜 적막 속에 들어오는 “실금만 한 빛”에 대한 복원이자 ‘눈부신 사랑의 기록’이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오느라 “조금 지친 빛”을 다독이는
어린아이의 작고 연한 손으로 쓰인 시
그러나 유년의 기억이 마냥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입구가 넓고 끔찍한 서로의 꿈속을 들여다보듯 바라보기“도 하고 어린 나는 마당에서 앵두를 따며 “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유년의 기억은 어쩔 수 없이 유실되고 상실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므로. 시인은 시간이 지나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로, “사랑 때문에 비굴한 말을 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시집에서 두 번째로 수록된 시「다친 작은 나의 당당한 흰색」에 등장하는 “한 무더기로 낭비되고 있는 저 환함” 즉 첫눈은 아직 어른이 되기 전, 무결하고 깨끗했던 어린 시절을 향한 동경을 상징한다. 환한 빛을 한없이 낭비해도 될 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던 시간. 그러나 과거로부터 여기-현재에 도착한 빛은 긴 시간을 향해 오느라 “어딘가 조금 지친 빛”이다. 시인은 “지친 빛”을 위로하며 어린아이의 연한 손으로 시를 써내려간다. 김연덕이『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을 엮는 과정은 곧 과거를 다독이며 조금씩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쇠락하는 기억 속에서, 유실과 상실이라는 필연과 두려움을 딛고서.
그리하여 5부의 마지막 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때, 비로소 시인은 “현재라는 기쁜 슬픔”을 맛본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Ⅹ』는 봉주연, 김연덕, 안미린, 유선혜의 개성을 담은 시집을 분기별로 선보이게 된다.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한국 시 문학이 지닌 진폭을 담아낼 이번 시리즈는 비주얼 아티스트 강서경 작가의 표지 작업과 함께해 예술의 지평을 넓혀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