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p.6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던 1990년대 초가을, 남편은 나에게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처음에는 그저 ‘왜 이런 걸 하라고 하지?’라는 생각만 들었지만, 새로운 도전은 내 삶에서 큰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p.7
그리고 마침내 405일간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을 포함한 17개국을 항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도전은 내 삶의 전환점이자, 스스로의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여정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가 들수록 시작은 점점 두려워지고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더욱 이 항해 프로젝트를 꼭 완수하고 싶었다.
p.10
이렇게 매 순간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항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내면을 마주하는 깊은 시간이 되었다. 바다는 나를 늘 시험했지만, 동시에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때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믿는 법을 배웠고, 또 때로는 거센 바람을 타고 나 자신을 넘어서는 용기를 얻기도 했다.
p.23
나는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 후에도 늘 방랑자처럼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다. 특히 영화나 책을 읽고 나면 내가 꼭 주인공이 된 것처럼 환상에 빠져, 밀린 숙제를 하듯 그 장소에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p.27
드디어 요트가 있는 크로아티아로 떠나는 날이다. 러시아 국적기 아에로플로트Aeroflot 항공을 타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크로아티아로 가는 여정이다. 예쁜 며느리가 사준 편안한 크록스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크록스에 매달린 하트와 스마일 장식이 나의 앞날을 응원하는 듯하다.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p.39
손주가 태어났던 날, 나는 북태평양 사이판 연안에서 항해 중이었다. 꼬박 1년이 흐른 지금은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느라 첫돌에 참석하지 못해 야속한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첫 출항의 기쁨보다는 손주의 첫돌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할머니로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p.65
하늘을 보니 별들의 전쟁이다. 날마다 뜨는 별들도 그날 날씨에 따라 빛이 다르다. 오늘은 유난히 보석을 뿌려놓은 듯 영롱하다. 흔들리는 요트 내에서 카메라로 별을 촬영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다. 이런 날에는 가족들이 그립다.
p.142
어렸을 적 할머니 집 시골 마당에 모깃불 피워 놓고 멍석 위 할머니 무릎에 누워 별을 세던 생각이 난다. 내가 이곳 대서양 바다 한가운데 와서 항해를 하고 있는 것도 다 할머니 영향이 크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여자라고 기죽지 말고 살아라, 남자 열 몫 하고 살아라. 할머니의 바람이 조금은 이루어졌는지 현재 남자 열 몫은 못해도 그냥 무늬만 여자라는 말은 듣고 살고 있다.
p.201
출항 시 생활용수를 양쪽에 200리터씩, 총 400리터를 채워 항해를 하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해서 물을 아껴 써야 한다.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워터 메이커가 없어 가끔 소나기 오는 날에는 집수조를 만들어 빗물을 받아 사용하기도 한다. 마침 어젯밤부터 계속 비가 내린다. 생활용수용 빗물을 받기 위해 양동이를 스테이에 휀더 묶기로 두 줄로 묶었다. 빗물이 줄을 따라서 제법 많이 고였다.
p.219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없었다면 이 긴 항해를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요트 안에도 기본적인 주방 설비가 갖춰져 있지만, LPG 가스 주입 꼭지(마개)가 국가별로 사이즈가 달라 사용이 불가하거나 가스가 전부 소진되는 등, 특수 상황은 언제나 벌어진다. 심지어 강풍으로 인해 가스레인지 설비가 파손되기도 한다. ... 13,000원짜리 한국산 휴대용 가스레인지의 가치는 값으로 다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p.309
어젯밤 꿈에 손주가 요트에 있었는데, 바다로 떨어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장난감이 없어 요트에 있는 풍선을 불어주려고 했는데, 묶으려 할 때마다 터지고 찢어졌다. 실로 묶으려 했지만 실이 짧았다. 또 다른 꿈에서는 내가 사는 집이 아파트인데 물 위에 떠 있는 집이었고, 홍수로 물이 불어 집이 둥둥 떠다니기 직전이었다. 오후 내내 강풍이 불고 풍속은 25~34노트에 달했다. 큰 파도에 무섭고 너무 힘들다. 멀리서 큰 유조선이 지나갔다. 무전기로 연락했지만, 파도 소리와 엔진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현재 날씨를 물어보려 했는데 실패했다.
p.334
요트 타고 17개국, 50여 개 정박지를 거치며 17,000해리가 넘는 바닷길을 지나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짐을 꾸리던 그날로부터 405만의 일이다. 기나긴 여정의 끝,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인도양, 그리고 남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