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어쩌면 가장 무용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 종이에 한 문장씩 채워 넣는 그것이요. 그게 지금 당장 밥을 줍니까, 세계 평화를 줍니까. 그런데 그 한 문장 쓰는 데는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재미있는 것은, 이 무용한 것을 함으로써 내 삶의 모든 것이 유용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쓰기만큼이나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일을 찾지 못했어요. _16쪽
여러분의 삶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일주일에 한 번, 귀한 이야기를 건져 올려야 하는 엄청난 사명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조금은 다른 모습입니다. 조금 더 살금살금 걷는달지, 시선이 더 오래 머문달지,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는 식으로요. 우리는 그런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살고 있지만 동시에 쓰고 있군요, 하면서요. _37쪽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입장에서 시작합니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가 있지요.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나뿐이죠. 이 세상에서 누구의 입장도 절대적일 수 없고, 동시에 누구도 하찮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입장에서 보이는 세상을 쓰고 말해야겠지요. 내가 쓰기 전까지 누군가는 세상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중략) 공간과 시간은 배경이 되지만, 입장은 그것에 표정을 주는 것 같습니다. _57~58쪽
실패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삶에서의 실패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데, 어쩐지 글에서의 실패는 아름답고 찬란하고 짠하고 웃기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모든 아름다운 색을 가졌어요. 왜일까, 실패는 뒤태 미인인 걸까, 돌아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실패와 글의 실패는 다릅니다. 하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흐른다면, 다른 하나는 내가 시작하고 끝낼 수 있지요. 삶에서의 실패는 막대한 손실과 절망을 일으키지만, 글에서의 실패는 아무리 실감나더라도 글 속의 일입니다. (중략) 나의 조물주가 나를 손에서 가지고 놀듯이, 나의 실패를 한 번쯤은 조물락거려보자고요. _65~66쪽
지금 당장은 너무나도 나 같아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민망한 그 글을 언젠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무언가처럼 누군가에게 소개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여러분은 그 이야기로부터 떠나게 될 테니까요. 글만큼 끝이 있고 또 없는 것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자, 여러분은 쓸 수 있어요. 힘 내요. 잘 못 써도 괜찮아요. 또 쓰면 되니까요. 못 써보지 않은 사람은 잘 쓸 수도 없으니까요. _77~78쪽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쑥 꺼내 놓는 사람은 없어요. 오랜 기간 글을 쓴 사람도, 여러분이 좋아하는 바로 그 대박 작가도 오늘 빈 문서 앞에 앉아 도망칠까 고민합니다. 어쩌면 막막한 만큼 좋은 이야기가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힘들다고 바로 줄행랑쳐버리면 귀한 이야기가 왔다가도 아무도 없어 돌아가겠죠? 그 이야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이다? 다시 빈 문서로 돌아오는 것, 그것밖에는 별수가 없습니다. _75쪽
상실에 대해서는 막상 쓰기가 두렵다가도, 쓰고 나면 정말 별게 아니더라고요. 쓰면 쓸수록 나의 거대한 상실을 그 글자만큼 작아지곤 했습니다. 그걸 꼭 쓰고 나서야 알게 되곤 했어요. 글에서만큼은 상실은 거대한 그늘로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하는 것 같아요. 나의 상실이 누군가에겐 쉬는 공간이 될 수 있다니 멋지지 않나요. 그러니 마침 나에게 그늘이 있다면 쉬고 싶은 누군가에게 내줍시다. 용기를 내어 써봅시다. 그냥 사는 얘기잖아요. _119쪽
저는 여러분이 쓴 이야기들로 가득 찬, 커다란 도서관을 상상합니다. 그곳에서만큼은 결코 귀를 막지 않을 거예요. _198쪽
빈익빈 문익문. 빈 문서는 빈 문서를 부르고 문장은 문장을 부르니까요. 어제 만난 동료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같은 글감으로 싸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든든하지 않나요?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요. 벌써 여러분의 글이 보고 싶어 어깨가 들썩입니다. _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