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시가 찾아와 나를 벗긴다.
어제도 그제도 벗겼다.
그런데 벗고, 벗고, 또 벗으니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이니까 그동안 분실했던 웃음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 웃음이 나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었다.
고맙다.
아내가 이 시를 읽고
희망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아내의 운동화>
빗소리가 고즈넉한 오후
신발장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졸고 있던
하얀 운동화가 문득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신을 사람이 찾지 않아
몇 년 동안 혼자 외로웠다는
왜 꺼내주지 않느냐는
꽃핀 봄날
몇 년 만에 비 맞으며
자기도 바깥 구경하고 싶다는
그래도 그대는
일어날 줄 모른다
운동화가 그토록 기다리는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코를 골고 있다
바깥은 목련이
하얗게 웃고
개나리 진달래가
새봄을 노래하는데
<황혼을 바라보며>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붉은빛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우리 마지막도 저랬으면 하다가
아직은 좀 더 살아야지 입술을 깨물다가
어려워도 좀 더 살아야지 가슴을 치다가
아내의 숨소리를 듣는 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저녁
<아내는 거짓말쟁이>
아내는 거짓말쟁이이다!
편안하냐고 물으면
아내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린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편안한 것 같다
꼭 쥐면 금방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팔다리,
모든 것 다 내주고
이제는 텅 빈 것뿐인데도
까맣게 타버려서
이제는 가슴에 재만 남았을 텐데도
오늘도
편안하냐고 묻자
아내는 또 머리를 끄덕거린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편안한 것 같다
아내는 거짓말쟁이가 분명하다!
그대 이름은
안경 너머 해맑은 눈망울이 유난히 빛나던
그대 이름은
푸른 그리움이다
달라는 것 다 내어주고
한 점 바람에도 오소소, 떨고 있는
빈 들에 홀로 남은 허리 꺾인 수숫대다
다가가면
말없이 미소 지으며 살포시 안아 주는
그래도 끝끝내 입을 다물고 있는
그대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투명한 이슬이다
영원을 헤매는
그대의 눈빛과
그 눈빛에 그을린 나의 아픔이 하나가 되는
긴 입맞춤할 적마다
내 몸에는 어느새 그대의 문신이 새겨진다
아직도
날마다
내 안에서 끝없이 불타오르는
그대 이름은
대보름날 시뻘겋게 타오르는 달집이다
<몰라>
몰라는 우리끼리 통하는 아내의 별명이다.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부른다. 우리가 그렇게 불러도 아내는 싫어하지 않는 기색이다. 그 소리를 들을 적에도 그냥 맥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피식, 웃는다.
요양보호사가 다녀갔느냐고, 점심은 먹었느냐고, 낮에 목욕은 했느냐고, 물어도 아내의 대답은 늘 ‘몰라’다. 어떻게 그것도 모르냐고 물어도 대답은 또 ‘몰라’다.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묻고, 묻다가 지쳐서 우리는 그만 아내 따라 맥없이 웃고 만다. 그럼 아내도 뭐가 좋은지 우리를 따라 또 피식, 웃는다.
거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을 손가락질하며 저기가 어딘 줄 아느냐고, 빨리 나아서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도 아내는 머리를 흔든다.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살아온 시간을 모르겠다는 건지, 살아갈 시간을 모르겠다는 건지, 바람이 빠져나가듯 몰라, 몰라 할 적마다 나도 그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웃는 까닭은
내가 자꾸 웃는 까닭은
참았던 울음보가 터질 것 같기 때문이다
웃고, 웃고, 웃다 보면
울어야 할 일을 까맣게 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울기 시작하면 멈출 것 같지 않아
울음도 그만 아껴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다리
아내의 다리는 세 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두 개인데
아내는 세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개만 있어도
세상 사람들은
어디든 걷고 뛰고
맘대로 계단도 오르는데
아내는
한 개가 더 많은데도
맘대로 걷지 못합니다
운동하자고,
운동하지 않으면 평생 걷지 못한다고,
잔소리를 퍼부어야 겨우 일어나
달팽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흔들흔들 걷기 시작합니다
오른쪽 다리가 앞서면
그 뒤를 왼쪽 다리가 천천히 따라가면서
열 번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열 번씩 열 번을 채우라고 해도
겨우 세 번 하고는 주저앉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보다 하나 더 가진
아내의 다른 다리는
10년이 지났는데도
늘 새것처럼 반짝거립니다
나는 그 다리가
하루빨리 헌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사항(1)
이 나이에 그런 게 필요 있겠어?
그래도 굳이 말하라면, 글쎄 나는 그냥……
그냥, 옛날처럼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이나 한번 받아봤으면
그냥, 아침 출근할 때 일찍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 한번 들어봤으면
그냥, 한 번이라도 아내의 손잡고 그때처럼 남산에 올라가 봤으면
그냥,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아내의 노랫소리 한 번 들어봤으면
그냥, 그게 전부야
정말이야,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