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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게 묻다
헤어지는 중
어떤 외출
거슬림
같은 일요일
그들의 고전주의
늙은 밤
방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해설_이해할 수 없는 힘에 대하여 | 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김희진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고양이 호텔』, 『옷의 시간들』, 『양파의 습관』, 『두 방문객』, 『얼마나 이상하든』, 『다른 여름』과 소설집 『욕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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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쥔 수갑은 어느 단독주택 차고 앞에 채워져 있었다. 스테인리스로 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자바라 문이었다.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내 허리 높이의 자바라 문은 현재 쫙 펴진 상태로 닫혀 있었다. 문 너머 차고 안에 주차된 차는 없었다. 온 가족이 자가용을 타고 여름휴가를 떠난 듯, 빨간 벽돌집은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팔월 초입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그 태양을 피해 모두들 휴가를 떠나버렸는지 거리도 동네도 온통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동네는 마치 멸망 직후에 찾아오는 폐허의 고독처럼 쓸쓸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그 냉정한 분위기에 동조라도 하듯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도움을 좀 청해볼까 했지만 그마저도 기회가 생기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었다. 도와달라고 소리쳐봐도 휴가를 떠난 집들은 모두 다 묵묵부답이었다. 남의 집 자바라 문에 묶인 지 벌써 반의 반나절.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10~11쪽(「오후에게 묻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는 방 안에서 은둔하던 동안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한집에 살면서도 거의 얼굴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는 오직 그에게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이불 빨 때 되지 않았냐? 내놔라.” “쌀쌀해져서 그런지 오늘은 제법 만두가 팔렸지 뭐냐. 매일 오늘만 같으면 좀 좋아…….” “니 동생, 결혼한댄다. 상견례 하자는데 같이는 못 나가겠지?” “트렁크 팬티 몇 장 사다 놨다. 색깔 맘에 안 들면 말해. 다른 거로 바꿔다 줄 테니까.” “옆집 할머니, 돌아가셨다. 평생 외롭게 사시더니 갈 때도 외롭게 간 모양이더라…….” 어머니는 매일 그의 방문 앞에서 무슨 얘긴가를 건넸고, 물었고, 던졌다. 그는 전직 대통령과 유명한 여자 배우의 자살 소식을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었다. 주소 체계가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바뀌었고, 지폐 크기도 아담하게 바뀌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들어간 오만 원권 지폐의 등장을 알려온 것도, 독재자의 딸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고,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와 그 사고로 생겨난 수백 명의 바다 밑 차가운 죽음에 관해 알려온 것도 어머니의 그 목소리였다. “글쎄, 대통령 뒤에 숨어 있던 늙은 여자 하나가 온 국민을 우롱했다지 뭐냐. 화가 난 사람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고 일어났어.” “…….” “전직 대통령 두 명이 탄핵과 비리로 감옥에 들어갔단다.” “…….” 하지만 어머니의 부지런한 입놀림 뒤에는 어머니의 목소리만이 허허롭게 남아 조용히 흩어졌다. 그가 방의 인력을 운운하고, 사람이 어떻게 만두를 빚다 죽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을 때 말고는 어머니의 대화는 연극 독백처럼 쓸쓸했다. 물론 방 안의 그의 침묵도 고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99~100쪽(「어떤 외출」)

그는 모자챙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아이의 뒤를 밟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봐서는 곧장 집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퉁이를 돈 아이가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후미진 곳이 필요하던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경로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때 아이가 했던 말이 떠나질 않는다. “저 봤어요. 아저씨가 신발 훔치는 거…….” “신발 가게 아줌마가 시킨 거예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는 절대 순진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가 아이를 미행하게 된 동기였다. 그는 이 말은 용서할 수 있었다. “저 봤어요. 아저씨가 신발 훔치는 거…….” 그러나 이 말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신발 가게 아줌마가 시킨 거예요?” 이제 겨우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그에게 저 아이는 께름칙한 그 무엇이었다. ―177쪽(「거슬림」)

나는 빈 캐리어를 끌고 쫓겨나다시피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국에서 공부 중인 여자를 아내로 둔 저 남자의 삶은 나와 얼마만큼 다를까. 어떤 성장 배경을 지녔기에 저 남자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려고 결혼까지 한 걸까. 왜 나는 이렇게밖에 살아오지 못했는데 저 남자는 저렇게 다르게 살아온 걸까. 좀체 떨쳐지지 않는 그 생각들을 데리고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나면 무조건 올라탔다. 내려가는 방향인지 올라가는 방향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탔다. ―202쪽(「같은 일요일」)

나는 기미투성이 여자가 말한 대로 사고가 터질까 봐 이를 악물고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빙과를 집어 들 때마다 살이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손톱이 빠질 듯한 아픔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퉁퉁 부어서 아예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쥐어보려고 하면 손가락 뼈마디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뻣뻣하게 꺾였다. 좀체 나아질 줄 모르는 손 때문에 나는 며칠째 숯불갈비 집 아르바이트마저 못 하고 있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손이 척척, 착착, 쓰윽을 이어나갔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떠밀려오는 빙과들이 아슬아슬하게 겨우 상자에 담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오른쪽 새끼손가락에서 뭔가가 결락된 느낌이 들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목장갑 밖으로 피가 배어 나왔다. ―243쪽(「그들의 고전주의」)

이모의 시선이 텅 빈 방에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이모의 머릿속에는 저 방에서 커나갈 은우의 숱한 내일들이 떠올랐다. 은우는 저 방에서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겠지. 무수히 많은 고민의 밤과 성장의 밤을 지나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겠지. 웃고 우는 밤도, 수치의 밤도, 실패의 밤도 찾아올 테지. 그리고 저 방은 은우가 처음 마시게 될 술에 대한 기억이 되고, 호기심으로 피우게 될 첫 담배에 대한 기억이 되겠지. 은우의 첫 몽정과 첫 수음과 첫 꾸중을 지켜보게 될 방.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져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지켜보게 될 방. 결국 살아간다는 건 무언가를 하나씩 잃어간다는 걸 깨닫게 될 방. 그 혼자만의 방……. ―284~285쪽 (「늙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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