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카페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그녀를 이끄는 그의 어조는 영락없이 주눅든 채무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가 요새 좀 몰려 있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며칠만, 딱 며칠만 더 봐주라, 응?” 하며 눈썹을 팔자로 찌푸린 채 웃어 보였을 때 그녀 자신은 비정한 사채업자가 된 것 같았다. 숙은 그의 비루에 치가 떨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걸 애써 누르며 따박따박 내뱉었다.
- 〈비루와 남루 사이〉 중
내가 이 세상에 온 지 3억 5천만 년 전 식물의 화석이란 은행나무도 내가 있은 지 1억 년이나 뒤에 생긴 아기일 뿐이다. 그리고 나를 하늘의 골목으로 몰아세우는 저 인간이란 것도 바로 엊그제인 10만 년 전에 온 생물일 뿐이다. 내 몸의 알주머니에는 40개의 새 생명이 곧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저들은 모른다. 내 알주머니는 인간이 만든 맛난 독약도 견디는 내성을 내 지금의 기억과 동시에 갖춤을 인간들은 알량한 승리감에 도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핵 폭발만 일어나도 다 죽고 마는 미물들. 바퀴가 늘 구르듯, 언제나 생명을 부활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나.
- 〈나〉 중
직업상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 여성들을 보면서 한결같은 의문을 품었다. 왜 저들은 저토록 무기력하고 무덤덤할까? 그런 나에게 엔은 답이 되어 주었다. 스스로 무디어지는 연습을 수없이 했으리라. 파도와 모래에 시달려 동글동글해진 조약돌이나 투명한 조개껍데기처럼. 그것이 삶의 한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 〈엔의 그네〉 중
졸지에 마약사범 누명을 쓴 G 씨는 조사실로 끌려가면서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약은커녕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다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꼭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마약 탐지견은 따라오면서 계속 확신에 찬 몸짓으로 킁킁거렸다. - 〈개는 언제부터 개가 되었나〉 중
막상 그와 코를 맞대고 서니, 당혹스러웠다. 어머니와 어떤 사이냐고 물으려던 내가 그렇게 유치할 수 없었다. 지금껏 받은 교육과 상식, 나를 빚어 온 자존과 허위 의식까지 모든 게 나를 공격했다. 이렇게 쉽게 내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 〈시간을 빌리는 사람〉 중
“뭐라고? 서-울-대-학-교?”
반장 아줌마의 하마처럼 쩍 벌어진 입을 바라보면서, 오십대 중년의 아줌마들과 육십대 장년의 아줌마들과 칠십대 노년의 할머니들은 일제히 옷 만들기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단체로 징그러운 뱀이라도 밟은 듯 두 눈도 휘둥그레졌다. -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중
저쪽에서 정확한 위치와 지번을 묻고, 시인이 그 대답을 하고, 저쪽에서 다시 거기까지 출동하는 데 30분이 걸린다고 그때까지 차 출발하지 못하도록 잡아 놓고 있으라고 하는 말이 스피커폰으로 들리고 나서야 시인이 정말로 경찰에 신고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놈 아냐? A와 B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이 외따로 고립돼 살다 보면 괴팍해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 〈산속의 시인〉 중
러시아에 있을 때 친구들과 러시아 친구의 시골집에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함께 블리니를 만들었다. 블리니는 ‘젠장!’이란 뜻을 지닌 러시아 단어 ‘블린’의 복수형이다. 얇고 하늘거리는 빈대떡 같은 것이 팬에서 잘 뒤집히지 않아서 찢어질 때 “블린(젠장)!” 하고 내뱉는 말에서 유래된 요리 이름이다. 처음에 만든 블리니는 아직 길들지 않은 팬과 익숙지 않은 솜씨로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 〈첫사랑의 맛〉 중
딴은, 마을 사람들 전답까지 빚보증으로 끌어들여 위기로 내몰리게 하였으니, 마을에서 받은 냉대가 가당찮다고 할 수 없는 경우였다. 마을 피붙이들 빚보증 몫은 아버지가 어찌어찌 풀고 넘어갔기에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어쨌거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딴섬처럼 교류를 차단당하기까진 않았지만, 마실 걸음을 꺼리는 건 역력했다. 자식들 떠나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뜬 뒤로 어머니 혼자서 고향집을 지키셨다. 이래저래 겪어야 했을 수모 또한 만만치 않았을 테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들인들 그 기막힌 사연을 어찌 모르겠는가? - 〈밤길, 눈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