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선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싶어서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이 기쁨이,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별처럼 폭발해 그 별가루들을 우리 안에 퍼트렸을 것만 같다. 시선 속에서 빛나는 약간의 별가루들, 우릴 뒤흔들어놓고, 홀리고, 기어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섬광을, 이 파편화된 반사광을 자연 속에서 불시에 포착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 반사광들이 내겐 결코 빈약하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몽상들의 기원이니까.
_11쪽
이 열매들은 어두운 초록 속에 붉은 것이 흐르는, 붉고 기다란 송이 같았다. 요람 속, 아니면 이파리들로 짠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열매들. 초록 속의 붉음, 만물이 서로 미끄러져들어가는 시간, 느리고도 조용한 변모의 시간. 거의, 전혀 다른 세계가 현현하는 시간. 어떤 것이 문돌쩌귀 위에서 돌아가는 시간.
_15쪽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권한이 이젠 우리에게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단어는 닳고 닳았다. 물론, 나로서야 아름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안다. 그렇긴 해도, 생각을 해보면 나무들에 대한 이런 판단은 이상하다. 나로선, 그러니까 정말이지 세상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는 나로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면, 그게 바로 세계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기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전언을 가장 충실히 번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_31~32쪽
그 모든 색 중에서 녹색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깊은 곳에 낮과 밤이 조화롭게 있어서일까? 초록이라면, 곧 식물인가. 모든 풀과 모든 이파리. 우리에겐 녹음綠陰, 서늘함, 잠깐의 안식처.
_41쪽
다가가도, 3월 어느 날의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단지 몽상에서조차 그녀들은 당신보다 앞서 와 있다. 잎사귀 문을 밀어내면서, 거의 보이지 않는 방벽도 함께 밀어낸다. 초록 아치 밑에서 그녀들을 따라가다 몸을 돌리면, 어쩌면 자신이 더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는 걸, 흙바닥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_121쪽
이곳, 빛은 바위들처럼 단단하고, 딱딱하고, 눈부시다. 그러나 이들 위에 이 벨벳, 이 닳고 닳은 포목, 이 까끌까끌 보풀 난 모직. 산 전체가 가축 무리로, 목장으로 변해 있다. 다 이어져 있어, 스스로 버티고, 다 함께 버틴다, 태초의 그날처럼. 이 거대한 공간에 와 있으면 우리를 가두지 않고 환대하는 집에 있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_125쪽
4월, 브라마렐이라 불리는 여울목, 레즈강의 물이다. 집에 돌아가기 전 잠시 그것을 바라본다. 짧지만, 영원한 듯한. 서쪽으로 몸을 돌리면 강물은 넓게 벌어지고 하늘 크기만큼 커진다. 그 빛이 눈부시다.
_134쪽
접시꽃은 어떻게 피나? 여름이 지나감에 따라 키 큰 꽃대의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한편 발치에서는 그 넓은 잎사귀들이 녹슬고, 찢어지고, 때론 누더기처럼 떨어진다). 6월의 어느 날, 점점 높이 피신하는 방식의 이런 개화에 나는 깜짝 놀랐고, 나무들 꼭대기에서 황금빛으로, 산 정상에서 분홍빛으로 물들며 역시나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며 피어나는 저녁 태양이 떠올랐다.
_147쪽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날 따라와. 내가 너에게 여기 숨겨진 문을 열어줄게. 그런데 나 자신은 거길 지날 수 없다. 그래서 그게 어디로 통하지는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그곳에서 네 팔이 그 그을린 색을 더이상 잃지 않아도 되길. 일종의 빛 속의 유배지, 빛 속에 억류된 곳이길.
_187쪽
격류, 불타는 것. 마치 가장 신선한 것이 찰나의 순간 두 세계 사이의 불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나이 든 여행자가, 고개를 넘으면서, 까마득한 저 어린 시절을 향해 잠깐 고개를 돌리는 순간일까. 계곡 저 바닥에 몇몇 안개 조각들이 겨우 생길까 말까 한 1초의 공간. 그를 아직도 기다려주고 있는 것만 같은 것과 합류하는 듯한 착각, 환각.
_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