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야기하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묻다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당신의 지금을, 미래를 어떤 이야기로 채우고 싶은가’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종이 된 가장 큰 이유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꼽았다. 인간은 역사 이전 시대부터 이미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공유함으로써 연대하고 결속했다. 이야기는 인간 개개인의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집단의 규율이 되고,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었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위해 굳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차원, 종의 역사의 차원까지 확장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갓 태어나 인간으로서 삶을 시작한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스스로 이야기가 되고, 그런 숱한 이야기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삶의 서사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바로 ‘이야기하는 존재’로서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로냐 폰 부름프자이벨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파하는 일을 하는 저널리스트다. 그는 이야기를 쓰고 전달하는 일을 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그건 바로 우리가 ‘부정적이기만 한 이야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렇듯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넘쳐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나 믿음을 접은 채,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든다고 일갈한다. 부정 일변도의 이야기가 개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지를 깨달은 저자는 이야기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당신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 원하는가?’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든다
_ 이야기는 투표 성향, 소비 습관, 대인 관계, 신념 등 삶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경험을 기억으로 저장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타인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야기는 의미를 만들어내고, 공동체를 형성한다. 또한 가족, 친구, 커뮤니티, 나아가 사회 전체를 하나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며, 다양한 상황들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훈련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야기는 인격을 형성할 뿐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도 발달시킨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곧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들, 우리가 전달하는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 이야기의 내용,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은 우리가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할지, 돈을 어디에 쓸지, 휴가를 어디로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혹은 물건을 사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에도 영향을 미치며, 누구를 신뢰할지 말지, 누구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어떤 것을 기억하고, 어떤 것을 흘려 넘길지에 영향을 미치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묻고,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지에 영향을 미치며, 자녀를 낳을지 말지, 자녀를 낳았다면 어떻게 양육할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킨다. 개별적인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모여 신념을 형성한다. 신념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우리의 의사결정에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념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도 신념이며,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면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신념이다. 신념은 종종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믿으면, 일상에서 그 믿음에 부합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 믿음이 세계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신념은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신념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쁜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가
_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뉴스를 찾아 헤맨다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고, 신념을 형성하고, 이에 기초한 행동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이야기는 무엇인가. 저널리스트로서 저자가 이 화두를 틀어쥐게 된 것은 수십 년째 전쟁의 참화 속에 놓여 있던 아프가니스탄 현지 취재에 나서면서부터다. 아프가니스탄의 사정은 분명 좋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전쟁 이후 가난에 허덕이던 어느 가족은 온 식구들이 마약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 저자가 본 것은 참혹한 현실만은 아니었다. 거기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고, 바깥세상에서 고개를 외로 꼬고 보듯 오로지 절망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일상을 살아가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소재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절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소위 ‘이야깃거리’가 되고 ‘기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나쁜’ 뉴스, ‘부정적인’ 소식에 귀 기울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부정적인 뉴스의 전파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런 경향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불안해지면, 두려움을 더 불러일으키는 정보를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벼운 감기나 바이러스성 위장염을 겪으면서도, 혹시 암은 아닐까, 심근경색 전조 증상은 아닐까, 다른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건 아닐까 의심한다. 저자는 자신도 카불에서 그런 순간들을 뼈저리게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테러가 벌어진 뒤, 관련 뉴스들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온 도시가 테러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부정 일변도의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가장 문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그것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든,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든, 혹은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이야기이든 간에, 세상이 얼마나 나쁘고 절망적인 상황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상황을 개선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변화와 진보에 대한 의지를 다져야 할 자리에 냉담함과 무관심이 자리 잡게 된다. 어차피 모든 것이 나빠지고 있는데, 굳이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튀르키예의 소설가 엘리프 샤팍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번개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야만적인 폭력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꼭 더 많은 사람들이 부도덕해지거나 악해질 필요는 없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해지기만 하면 된다. 무관심하고, 고립되고, 파편화된 채 자기 삶에만 너무 골몰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는 상태가 될 때,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고 전혀 관여하지 않는 상태가 될 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감정의 결여는 모든 감정 중 가장 위험한 감정이다.”
나쁜 소식, 부정적인 이야기에 길들여진 개인들의 집단적 무관심과 냉담함이 가장 위험하다는 얘기다.
지금은 방향을 제시하는 이야기가 필요한 때
_ 부정과 절망의 이야기를 넘어,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한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이제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부정 일변도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야기다. 온 세상에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소식이 넘쳐나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 부정적인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나쁜 소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황을 개선시키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대안을 모색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문제+X’로 공식화하는데, 여기서 X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고, 더 나은 상황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될 ‘아이디어’일 수도 있고,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 그 자체’나 이를 위해 노력하는 ‘주체들’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진보는 ‘점진적이고 느리게’ 일어나기에 당장 극적인 변화를 느낄 수는 없겠지만, 중장기적인 추세를 볼 때, 지금까지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X’들 덕분이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 X라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X를 찾기 위한 실험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독일로 돌아온 뒤 <트루 워리어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200여 회의 상영회를 열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영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해 독일로 온 뒤 새로운 삶을 살아가나는 난민 청년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절망 그 자체가 아닌 절망을 딛고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상영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영화에 나온 난민 청년들의 삶에 대해 토론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 주어진 난관을 극복해 나갈 영감을 얻는다.
저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란 ‘완결되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나쁜 소식’이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나쁜 소식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최근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 전개에 비추어 볼 때에도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인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이야기’는 분명 나쁜 이야기로 끝맺음되는 것이 아닌, 변화와 진보, 희망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벼락같이 내려쳤던 절망의 사건에서 스스로 X를 모색했고, 연대했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듯, 희망의 이야기는 완결점이 있는 목표가 아니라 방향이고, 우리가 만들어 나가고 있는 이야기도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려는 지향에 대한 이야기다. 한 개인이, 그리고 한 사회가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것은 바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_ 세상은 나아져왔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을 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X를 모색하며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사건을 보는 방식, 문제를 보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사건 그 자체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 인해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부정적 감정에 빠지기도 하며, 악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에 대해, 사건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삿대질하는 데서 그칠 때, 우리는 이야기를 변화시킬 동력을 잃은 채 부정 편향적 사고에 매몰된다.
저자는 우선 세상이 점진적으로 ‘진보해왔음’을 인식하고, 앞으로도 더 나아져 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희망이 곧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실질적인 행동과 연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면서 스웨덴의 비영리 재단 갭마인더에 제시되어 있는 18개 질문들 중 몇 가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지난 100년간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절반으로 줄었다’의 3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데, 이 문제에 대한 오답률은 84퍼센트에 이른다. 정답은 ‘절반으로 줄었다’지만, 84퍼센트가 동일 수준이거나 더 늘었다고 답한 것이다. 갭마인더에서 제시한 질문들에 대해 응답자들은 대개 ‘부정적인 선택지’를 고른다. 실제로는 세상이 더 나아져 왔음에도, 많은 이들이 더 나빠져 왔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저자는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주의’를 넘어, 실은 점점 나아져 왔으며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의 전환을 주문한다. 덧붙여, 낙관주의는 비현실적 몽상이 아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현실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작금의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우리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시인 메리 올리버가 애드거 앨런 포의 비관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적한 대목을 인용한다.
“비관주의는 (…) 감정적 체계의 결핍과 믿음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부연하자면, 자기 신뢰가 아니라 (…) 좋은 가능성과 나쁜 가능성을 모두 가진 세상 전체에 대한 믿음의 결여다. 포는 과거와 다를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비관주의는 미래가 과거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낙관주의는 아무 생각 없이 양지의 아늑한 벤치에 팔짱을 끼고 앉아, 어차피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안이한 믿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관주의는 모든 일에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며, 우리가 함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곧장 포기하느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 사회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속한 사회를 어떤 이야기로 채워 나가느냐는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우리의 지금을, 우리의 미래를, 절망과 비관의 이야기로 단정 짓지 말고, 희망의 이야기로 만들어 나가자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