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겸손하고 성실한 그의 창작 태도가 결국 「마담 보바리」 같은 명작을 낳았다. 나 또한 그처럼 다듬고 또 다듬는 장인정신으로 문체와 형식에 충실한 소설 장인으로 달려 나가겠다. 천재 작가나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할 바엔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듯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소설 장인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스승이 있다. ‘알베르 카뮈’. 그가 나지막이 나에게 들려준 생명 같은 한마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무한한 시간의 넓이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정해진 것이 없어.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지. 충분히, 많이, 오랫동안, 원하고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무엇이든지….’
그렇다. 두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죽을 때까지 정진 또 정진만 있을 뿐이다.
이광복 (소설가 ·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채종인 작가의 소설집 「유미의 바다」에는 인생이 무엇이며, 현실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그 본질상 어떠한가에 대한 분석과 소설적 서사가 균형감각을 이루며 묘사되어 있다. 또한 소설에서 현실적인 소통을 가능케하려면 어떤 것을 다루어야 독자와 공명할 수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소설을 발표한 채종인 작가의 앞으로 활동을 기대하며 정진을 빈다.
김성달 (소설가 · 문학평론가)
채종인 작가의 소설 「유미의 바다」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예술적 윤리’가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우리는 타인과의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그 명제를 다시 일깨우고 있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자로서의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함께 살아야 할 운명에 대한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을 감싸는 안개, 눈을 뜨겁게 하는 습기, 몸을 감고 도는 바람, 오늘 하루를 넘긴 숨소리의 고유한 체험을 느낀 독자라면 어떤 진실한 사유보다 더 공감되는 자연스러운 운명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채종인 작가의 소설에서 발견하는 이런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책 속에서
언젠가 유미는 아빠랑 차를 세워두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파도는 일정하게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파도가 뿌려놓고 간 소리는 코발트 빛 하늘이 쉼없이 거두어갔다. 아빠는 차에서 내려 모래밭을 거닐며 말했다. 저 수평선 너머 낯선 곳으로 쫓겨 간 삼별초 군사들. 그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어떤 이는 기와를 굽고, 어떤 이는 성을 쌓으면서 목숨을 이어가겠지. 그걸 생각하면 서글퍼져. 하지만 그게 바로 인생이겠지. 참고 또 참는 것. (「유미의 바다」) 중에서
그저 이런 섬처럼 묵묵히 견디며 평생 살 각오를 하니까 오아시스가 따로 없고 지옥이 따로 없습디다. 섬이란 게 때로는 꿈이 되었다가 지옥도 되었다가… 내가 짓는 시처럼 노래가 되기도 하고 눈물이 되기도 하고… 아내가 떠난 지 벌써 십수 년이 되었수다. 찾지 못한 시신 대신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분홍 구두 한 켤레로 무덤을 만들었지. 저 뒷산 부모 산소 옆에 묻고 여태 말 한마디 안 하고 살아온 세월이 이렇게 되었수다. (중략)
가방을 배 위에 올려주며 나는 그녀의 눈 속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먹은 나이만큼 잘 참았다. 배는 떠났다. 오래전 나를 실은 배가 부두를 떠나듯 그녀를 실은 배가 하염없이 밀려오는 물결만 남긴 채 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섬이 되어 섬을 바라본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섬이 되어 서로 멀어져 갈 때 섬들은 저마다 숨죽이고 울게 마련인 모양이다. 나는 아내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을 또 오랜만에 그녀를 보내며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섬」 중에서)
여자의 복부에서 꺼낸 자궁을 열어놓고 그 속에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연필을 쥔 왼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나 세밀하게 선을 그어나간다. 그는 세상이 두려웠다. 까닭없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특히 밤이 더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인체를 해했다. 자연을 빼닮은 인체를 들여다보며 세밀하게 묘사를 이어갈 때면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곤 했다. 그는 가장 께름칙한 소재를 택해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왼손잡이 아내」) 중에서
…그날 나는 그곳에 붙박혀 소리 없이 울었다. 마음이 아프거나 괴로워서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 넉넉하지 않은 공원에서나마 저처럼 부러울 것 없이 활개치며 웃어젖히는 남녀노소 모든 형상이 그렇게 정겹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결국 아버지가 이 땅을 떠나지 못했듯 나 또한 이 공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공원에서」) 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지하 단칸방에서 버텨가며 빚을 다 갚을 동안, 할머니는 홀로 고향 집에 남아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하고 밭에 나가면 해가 훤히 떠서야 집으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서늘한 마루에 새우처럼 등을 꼬부리고 낮잠을 잤다.
가끔은 이웃에서 점심은 드셨냐고 찾아보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대부분 점심을 거른 채 찬물 한 바가지만 들이키고 밭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베어낸 오동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몇 번 고르고는 이내 밭이랑으로 걸어가 초록 잎사귀들 사이로 꼬부랑 등을 감추곤 했다. (「눈 속의 아기 부처」) 중에서
내가 군함을 타면서 가장 가슴 졸인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항해 당직이 끝나고 침실로 내려와 침대에 몸을 묶고 잠을 청할 때면 정신은 되레 말똥말똥 되살아났다. 내가 누워 있는 침실은 바닷속이었고, 거대한 파도가 선체를 때리는 소리는 천둥소리처럼 무거웠다. 억지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 주위를 둘러보면 고래뱃속 같은 둥근 침실은 좌우로 흔들거리며 어디론가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입안이 마르고 손가락 발가락이 이유 없이 꼼지락거려졌다. 거칠고 어두운 밤바다 수천 길 아래로 군함 한 척 가라앉는다고 해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침을 맞을 것이다. 가라앉은 군함 속의 나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리라.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 악몽 같은 일도 그런 상황에서 벌어졌다. (「포항함 75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