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김태익 작가의 글에서 잊고 있던 고향을 다시 보게 된다. 가족·친구들의 얼굴과 별명이 떠올라, 참 멀리 왔구나,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설친다. 이처럼 『당신이 사라지는 속도』에는 사라진 것을 환생시키는 마술이 감춰져 있다. 도시 불빛에 가렸던 별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고, 쫓겨났던 개구리가 돌아와 합창을 한다. 져버린 꽃들도 앞 다투어 꽃송이를 벌린다.
그렇게 이 책을 통해 이야기의 꽃밭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앞서간 발자국을 잊지 않는다. 그것을 자신의 궤적으로 만들면서, 또 다른 길을 낸다. 그 과정이 이 책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때로 실수로 길을 벗어나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바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일군다. 그건 그가 선대와 후대를 잇는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진지함과 유머감이 공존한다. 페이지를 넘기며 읽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박장대소를, 어떤 부분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맑아진 나의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당신이 사라지는 속도』 속의 길을 같이 걸어보자. 세상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길상호(시인)
책 속에서
P. 18
세월이 흘러, 극락전 처마 밑까지 승용차가 질주할 수 있는 절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하나둘씩 세상에 들키고, 편리해지고, 그만큼 마음의 자리에서 멀어져 가고.
P. 26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 속도만큼이나, 어머니의 얼굴도 빠르게 어두워졌다.
p. 44
산사에 며칠 머물며, 살아온 삶의 때를 단번에 벗겨내려 했던 시도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부딪치며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자 조금씩 진정되는 기운이 느껴졌다.
P. 87
글쓰기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힘겨운 길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오늘도 나는 그 산을 오른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마음을 실으며,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P. 99
시간을 잊은 듯한 중세의 거리, 그 낯선 골목을 함께 걷다 보면, 저물어가는 인생의 그림자마저 잠시 잊을 수 있으리라.
P. 118
동쪽 인봉산 너머로 붉은 기운이 어둠을 몰아내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조바심 따윈 아랑곳없이 제 길을 간다.
P. 129
이쯤 되면 내 삶은 방물장수의 보따리 같다. 이것저것 다 담고 싶어 하다 보니 정작 제대로 꺼내 보인 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욕심이 많아, 어느 것 하나 버릴 수가 없다.
P. 133
나무는 늙어도 재목으로 쓰이지만, 사람은 늙으면 쓸모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지만, 세월이 지나며 문득 그 말속에 숨은 씁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건, 단순히 나이만 먹는 일이 아니다. 고집은 세지고, 마음은 닫히고, 변화엔 둔감해지고, 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 날, ‘꼰대’라는 말 앞에 자
신이 서 있다.
P. 144
수영장에선 남녀를 불문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거의 나체로 마주한다. 허릿살이 엉덩이보다 더 도드라진 중년의 아주머니, 아랫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저씨. 다들 평소엔 옷 속에 감춰 두었던 모습을, 이곳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다. 평상시엔 알 수 없던 굴곡과 세월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이상하도 민망함보다는 묘한 편안함이 있다.
P. 147
어디선가 익숙한 듯 퀴퀴한 노인 냄새가 스친다. 예전엔 그런 기미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던 나였지만, 이제는 문득, 그 냄새가 내게서 나는 건 아닐까 싶다. 쓸쓸함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체념이 스며든다. ‘이제는 나도 늙었구나.’ 젊은이들 사이에 있을 땐 말끝마다 존댓말을 얹고, 조심스레 행동하게 된다.
P. 152
이제는 당신 가신 길을 제가 따라갈 차례입니다. 당신이 남긴 사랑의 깊이를, 제가 아들딸에게 얼마나 전했는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절반만이라도 세상에 나누고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바람은 없습니다.
P. 171
그건 술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갓난아이가 자라서 제 삶을 꾸리는 날, 내가 아꼈던 그 맛을 기꺼이 나누고 싶었다. 그날이 오면, 병뚜껑이 아닌, 잔에 가득 담아 함께 마시고 싶었다.
P. 175
물 빠진 저수지 계곡 여기저기에 흩어진 돌무더기들이, 예전 할머니 고향 집 담장의 흔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몰된 지 30여 년, 물속에 잠들어 있던 마을이 오랜만에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그날의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