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비숍은 8세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해 12세에 첫 문학상을 받으며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배서칼리지에서 매리 매카시 등과 함께 문예 잡지를 창간했고, 3학년이던 1933년 T.S. 엘리엇을 인터뷰할 학생 대표로 뽑혔다. 1934년 바서 도서관 사서의 소개로 메리앤 무어를 처음 만났을 때, 무어는 46세의 아직 유명세를 얻기 전인 존경받는 시인이었고 비숍은 23세의 무구한 가능성을 품은 학생 시인이었다. 비숍은 훗날 무어를 ‘즉시 사랑하게 되었다’고 회상했고 무어의 이니셜 ‘M’이 예의(manners)와 도덕(morals)만이 아니라 어머니(mother)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시 「한 가지 기술」에 나온 “사랑하는 세 집” 중 세 번째는 무어의 이름을 따라 “마리아나의 집”으로 명명했다. 무어는 비숍에게 스승을 넘어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었다(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불과 한 달 뒤, 비숍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이들은 속내까지 다 터놓지 못했고 시에 관해서도 때로 대립했지만, 서로를 알아봤고 인정했다. 이 책에는 무어를 향한 마음이 담긴 시 「미스 매리언 무어에게 보내는 초대장」, 무어 모녀가 고전적인 어휘로 고치려다가 비숍의 거부로 실패한 시 「수탉들」, 무어가 외면하고 매체들도 게재를 거부한 연인 로타에게 헌정한 시 「샴푸」 등이 수록돼 있다.
비숍은 생후 8개월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비숍이 5세 되던 해부터 사망 때까지 20여 년을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비숍에겐 진짜 집이 없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있는 외조부모의 집,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있는 친조부모의 집, 모드 이모가 살고 그레이스 이모가 비숍을 돌보러 와준 보스턴의 바닷가 집을 전전하며 유년을 보냈다. 천식과 습진 증세가 심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린 비숍은 크고 냉담한 친가를 떠나 다정한 이모들과 지내게 된 것이 좋았고 그 때문에 이모부의 학대를 숨겼고,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학창 시절엔 텅 빈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친구 집에 얹혀살았고 보스턴의 저렴한 호텔에서 홀로 휴일을 보냈다. 첫 시집을 출판한 1930년대 중반부터 여행을 시작한 비숍은 바서칼리지 동창 루이즈 크레인을 따라 플로리다에 갔고 그곳에서 키웨스트를 발견했다. 비숍은 고립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주는 섬에 끌렸고 크레인과 헤어진 뒤로도 10여 년간 키웨스트를 찾았다. 전쟁 중에도 비숍의 여행은 계속됐지만 그의 건강은 우울증, 알코올의존증, 천식으로 더욱 악화됐다. 1942년부터는 글을 쓰지 못하는 불능 상태가 되었고 1946년엔 술 문제로 정신병원에 두 달간 입원했다. 더는 길이 없다고 느낀 1951년, 비숍은 충동적으로 브라질로 향했고, 리우데자네이루주에서 일생의 연인 로타 지 마세두 소아리스를 만난다. 지주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소아리스는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산속에 비숍을 위한 작업실을 지어주었고, 그곳이 비숍에게 완벽한 섬이자 마침내 얻게 된 집이 되었다.
「강사람」 등 비숍이 브라질 시기에 쓴 빛나는 시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발표되어 시집 『여행의 질문들』(1965)에 수록된다. 그러나 시집 출간 무렵 멀어지고 있던 비숍과 소아리스는 비숍의 외도를 계기로 결별에 이른다. 그 후 천식 발작이 심해진 비숍과 정신적으로 무너진 로타는 격리와 재회를 반복하다가, 1967년 가을 미국에 있던 비숍을 방문한 로타가 다음 날 쓰러져 생을 달리하면서 영원히 이별한다. 안 그래도 죄책감에 사로잡힌 비숍은 로타의 친구들로부터 맹렬히 비난받았고 둘 사이에 별일이 없었음을 항변해야 했다. 로타가 떠난 그해 크리스마스 직후 비숍은 로타를 질투심으로 무너뜨린 외도 상대와 동거를 시작했지만 그 관계는 불행하게 끝난다.
1970년부터 비숍은 하버드에서 작문 강의를 한다. 친우이자 하버드에서 교사로 자리 잡은 로버트 로웰이 마련해 준 자리였다(두 사람의 편지는 책으로도 출간됐다). 캠퍼스에 있는 동안 비숍은 다시 쓰기 시작해 더디게나마 인생 시들을 완성한다. 1972년엔 “정말로 좋아하는 시라 꼭 완성하고 싶었던” 「큰사슴」(그레이스 이모에게 헌정한 시)을 25년 만에 마무리해 발표한다. 10년간 쓴 10여 편의 시를 담은 마지막 시집 『지리 Ⅲ』(1976)은 “덜 형식적이고 더 ‘열린’” “감정이 더 넓게 많이 담긴” 시라는 평을 듣는다. 이 시집은 당시 연인이었던 하버드의 행정 보조 앨리스 메스페슬에게 헌정된다. 비숍의 불길한 예감대로 메스페슬에게 새 이성 연인이 생기면서 끝나는가 싶었던 둘의 관계는 비숍의 약물 과다복용 사건 등을 거치며 재개되어, 1년 반 뒤 비숍이 뇌동맥류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옮긴이 이주혜는 ‘옮긴이의 글’에서 비숍을 끝없이 여행에 나서게 한 진정한 추동력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시를 옮겼다고 고백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두고 고심한 흔적이 남아있는 비숍의 친필 원고들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안을 얻기도 했다고 전한다. “시인은 역설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이 끝없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원형의 집을 꿈꾸고 찾아내기 위한 지극한 상상력이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 여정이 어떤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점마저 엿보인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비숍 비평을 한국어로 옮기고(『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비숍의 일화나 시가 등장하는 소설을 발표하고(『자두』,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비숍의 시 「세스티나」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첫 산문집을 출간한(『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비숍을 깊이 새겨 온 이주혜의 섬세한 번역이, 이미 유명하지만 아직 새로운 비숍을 비로소 만나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내 묘비명을 쓸 거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써줘야 해.”
- 엘리자베스 비숍이 로버트 로웰에게
모든 어수선한 활동이 계속되는데, / 무섭지만 명랑하다.
- 「만」의 부분, 비숍의 묘비명
사후인 1981년에 공개된 1978년의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비숍은 스스로를 언제나 강력한 페미니스트라고 여겨왔다고 말한다. 어느 기자가 자기를 에리카 종이나 에이드리언 리치와는 대조되는 ‘구식’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시가 선전 선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 “시가 개인의 철학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로 기사화된 사례를 전한다. 여성 시인 선집에 참여하지 않은 일로 페미니즘 운동을 반대한다고 오해받은 비숍, 어딜 가나 점잖은 ‘숙녀 시인’ 대접을 받던 비숍, 자기를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고 작품을 많이 공개하지 않아 수줍음과 절제, 과작의 시인이라 불린 비숍이, 그의 사후 펼쳐진 ‘비숍 신드롬’을 지켜본다면 뭐라고 할까. 독자로서는 다행이고 행운이지만 ‘이 시만은 빼주세요’ 하고 외치는 그가 상상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엘리자베스 비숍 시 전집의 최종판인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는 태어난 지는 115년, 사망한 지는 50년이 되어가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현재적 위치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제 독자 각자가 ‘구식’이기는커녕 너무나 모던한 비숍을 만나 “정직하고 용기 있게” 읽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