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세상의 모든 만남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매 순간 만나고 매 순간 작별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작별하고, 생각과 사물과 작별하고, 빛과 그림자와 작별하고, 세상의 온갖 인연과 작별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라는 것도 예기치 못한 만남과 작별 사이의 우연한 순간들일 뿐입니다. 작별에 기술이 있다면 그건 작별하지 않는 것일 테죠. 하지만 또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이런 우리네 삶을 나름의 글로 표현하여, 삶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들은 뼈아픈 작별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함께 곡절을 겪으며 세상에 나온 이 책이 여러분 삶에 사랑으로 깃들길 바랍니다.
책 속에서
얼마 전 잠꼬대 같은 아들의 독백이, 헛소리가 아니었단 말이지. 목덜미에 이름표를 달고 게으른 딸년처럼 널브러져 있는 저것이 진정 ‘나의 제이미스’란 말인가. p.18
해마다 제비꽃이 필 때면 손가락이 욱신거리면서 ‘잔이’가 생각난다. 그 시절 나는 ‘잔이’와 내가 몇 억겁의 인연으로 만난 인과관계라는 것을, 확률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p.37
바람에 찔레꽃 향이 날린다. 찔레꽃 향은 어머니의 분내와 닮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목이 메는 향. 암만 경박하고 둔감할지라도 찔레꽃 향에 마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순박한 꽃을 나는 어머니의 꽃이라 이름 붙였다가, 비애의 꽃이라 바꾼다. p.43
그걸 미리 알 수도 없고 알려줄 수도 없어서 저마다 섭섭한 눈으로 이별하는 거라고, 그래서 찔레꽃이 필 때면 찔레꽃처럼 우는 거라고, “밤새워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p.62
꽃 중의 꽃, 모란이 피면 봄은 절정에 달한다. 어머니는 모란을 유독 좋아하셨다. 모란이 지는 봄날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찬란하고도 슬픈 봄.’ p.88
아들이 쓰러졌다. 천둥 번개가 치자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새처럼 한순간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그 여름 내내 수챗가에는 물이 고여 썩고 있었다. p.116
그 아들은 ‘우리’ 속에 포함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는 차별되는 개별적이고도 특별한 존재였다. 털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될 존재가, 쓰러지고 말았다. p.123
사랑이라는 이름의 끔찍함에 대해 딸들은 다시 퍼렇게 질렸다. 굳게 입을 닫은 안방 방문 위에는 여전히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삐뚜름하게 걸려 있었다. p.125
세상에 하찮은 슬픔은 없다. 사무치는 슬픔이 있는가 하면 후회로 얼룩진 슬픔이 있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슬픔이 있는가 하면 가없는 슬픔이 있다. p.140
인생은 전적으로 비극적일 수 없다. 우연히, 기적적으로 장막이 걷히기도 한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p.147
하나의 길을 고집하면 그 길밖에 없다. 단풍나무 숲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으로 ‘나는 괴로워했다’. 바로 앞에 길을 두고 ‘가지 않는 길’이 돼버렸으니. p.185
사람 사이가 틀어지는 데는 대체로 말이 문제다. 말이 거칠다고 속마음까지 거칠까마는, 생각과 말은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 말 따로 생각 따로는 모략이나 계책일 뿐이다. p.204
모든 생명은 성장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간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11월을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p.234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절대 고독의 독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고독의 방에서 빠져나와 지극히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p.269
사람 사이에 완전한 관계란 있을 수 없다.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일도,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p.284
눈은 내리고 천지는 고요한데, 이 느닷없는 통증은 뭔가? 이 떨림은? 열이 오르고 한기가 들고 몸이 떨리는 이 오한은? 한 시절 때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눈뿐이랴. p.292
여든이 뒤돌아보는 예순은 얼마나 젊은 날인가. 아흔의 노인은 여든을 바라보며 아직 꿈을 펼칠 나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p.302
‘어두운 밤을 쉬이 받아들이지 마시오. 노년은 날이 저물수록 불타고 포효해야 하기 때문이니,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p.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