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에 남은 온기, 조용히 사라진 것들이 남긴 기척에 귀를 열어봅니다.
때로는 소리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어 내기에,
‘없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대신해
말을 걸어오는 순간에 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시가 지나는 자리라 믿기에
따라 걸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2025년
이희경
책 속에서
<조용한 식물>
집 앞 작은 텃밭에
깻잎 몇 줄 심어두었습니다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잘 자라면 다행이고
말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정도의 마음으로
햇빛은 골고루 내리고
비는 가끔씩, 너무 늦지 않게 왔습니다
며칠 뒤, 한 뼘을 훌쩍 넘는 키를 자랑하며
줄기와 잎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는데
도시는 여전히 바쁘고
나는 요즘 조용한 식물 하나를 알아갑니다
무언가를 잘 돌본다는 건
내가 나를 덜 다그치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부르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햇살을 감지하는 일
물기를 기억하는 일
그저 잘 있는 것, 그걸 알게 되는 오후입니다
<안경>
창이 열리면 세상이 또렷해진다 흐릿했던 얼굴들, 알아챌 수 없던 표정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나뭇결, 돌멩이의 주름, 사람들의 눈썹 끝에 맺힌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한다
길고양이는 길거리를 떠도는 이야기를 전하고 흩날리는 낙엽은 허공을 맴돌다 한순간 작은 새 떼가 되어 날아오르고 비 오는 날 유리에 맺힌 빗방울들은 떨어지면서도 작은 우주를 머금는다
누군가는 붉은 하트를 날리고 누군가는 하얀 구름 위를 걷는다 홀로 선 소년의 머리 위엔 초록 싹이 자라고 어느 노인의 창가엔 바닷가의 여름이 출렁이고 속삭이는 연인들은 마주 볼 때마다 금빛 나비들이 서로의 입술을 오간다
꺼질 듯 깜박이는 네온사인 같은 생각들 서로 얽혀 길을 잃은 바람들 불현듯 터져 나오는 독백 같은 눈물은 안경 너머로도 선명히 비친다
내게 상처를 보여줄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아픔 앞에서 여전히 흐릿하다 너는 안경을 고쳐 쓰지만 나는, 안갯속에서 너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불안이 스며든 렌즈를 닦아낼 때 불안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 그럴 때마다, 너의 마음은 조금씩 밝아진다
<짧은 스파크>
잘못 기억할 때가 있다
손목이 어깨를, 어깨가 입술을
닿지 않는 손을 내밀면
네온이 꺼진 골목에
짧은 스파크가 튀었다
켜졌다 꺼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누전으로 연결된 줄들이
떨어진 물방울을 따라
젖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종종 너를 닮은 속도를 타 보는데
유리창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물방울 같았다
플랫폼에 남아 있는 나
전철은 문이 닫히고
젖은 도로를 빠져나가고
잠이 깬 듯
말을 고르다가 스스로를 놓쳤다
한 번도 버릇처럼 들리지 않았던 말들
우리가 건네던 사소한 인사들
너무 늦게 알았다
그날,
가볍게 젖은 어깨로 돌아서던
우리는 서로를 피해 걷는 연습을 했지
버려진 우산 옆으로 비가 모였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