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저는 한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국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전쟁은 어린 저에게서 평범한 유년기를 앗아 갔고, 언어장애라는 짐과 함께 너무도 이른 책임을 어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매일이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p.8
이후 미국으로 떠난 여정은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문화. 그러나 가장 낯설었던 것은 제 자신에 대해 피어나는 끊임없는 의구심이었습니다.
‘나는 과연 자격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p.9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깊은 고통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 일이, 나에게는 마치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p.28
전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따뜻했던 교실, 친구들의 웃음소리, 어머니가 싸주시던 도시락까지ㅡ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순간에 평범한 일상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뒤덮였다. -p.36
사람들은 매일 거짓말을 하면서 산다. 나도 그렇다. 거짓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는 말이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 또는 나를 속이기 위해서 아니면 둘 다 속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에는 색깔과 온도가 있다. -p.63
바로 언어장애. 말더듬증은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특히 국어 시간은 공포의 순간이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책을 읽도록 시키면 나는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이번엔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하지만 어김없이 내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얼어붙은 듯 입을 떼지 못했다. -p.45
놀랍게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를 남기고 가셨다. 가족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내가 장례식에 오지 않기를 바라셨다. 내게 충격이 클 것을 염려했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겠다는 책임감에 학업을 포기할까 걱정하셨던 것이다. -p.82
그래서 나는 UCLA에서 가장 먼저 장학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능력은 있지만 돈이 없어 기회를 놓치는 학생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내 인생이 내게 준 사명 같은 것이었다. - p.87
깊은 고민 끝에 나는 깨달았다. 문제는 단순한 신체적 조건에 있지 않았다. 차이는 심리적 조건에 있었다. 우리 속에 갇힌 쥐들은 단순한 추위만이 아니라, 자유를 빼앗긴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함께 견뎌야 했다. 반면 탈출한 쥐는 비록 더 큰 불확실성과 생존의 위험에 직면했지만, 자유롭게 움직이고 탐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가 신체적 스트레스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p.95
나는 치열하게 움직였다. 미국 전역의 의과대학과 치과대학에 수십 통의 지원서를 보냈다. 간절함이 종이 위에 스며들 만큼 한 자 한 자 정성껏 눌러썼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뿐이었다. -p.121
가끔은 너무 벅찼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나의 꿈을 위해. 그 시간들은 나의 학문적 성장과 헌신의 시기였고, 하버드의 학생이자 동시에 교수로서, 두 개의 이름을 짊어진 고된 여정이었다. -p.169
내가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한 경로가 아니었다.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 회복과 극복의 과정이자 낯선 세상에 몸을 던지고 적응해 낸 생존의 서사였으며, 끈질기게 분투하며 나아간 인내의 기록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조지아 오거스타로, 보스턴으로, 그리고 마침내 로스앤젤레스로. 도시는 바뀌었지만, 그 안에서 싸워야 했던 나의 결기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