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졌다.
진부한 언어와 낡은 서정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위로는 음악이었다.
십 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게을렀다.
2025년 여름
박시우
책 속에서
우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양재기에 밀가루 반죽을 쾅쾅 치댔지 수제비를 뚝뚝 끊어내면서 미끄덩거리는 반죽을 보니까 사지에 힘이 빠져 그만 그릇을 놓쳤지 뭐여 근데 뭔 정신이 그랬는지 몰라 대체 뭘 건지려고 했는지 나도 모르게 끓는 솥에 손이 들어가데
그때부터 첫 장맛비가 오면 손이 떨려 뭘 하들 못 혀 다 업장이여 업장 고것들하고 핏줄이 같은 죄로 말이여
--- 「장마」 중에서
가끔 헛것을 보는지 허공을 깨물고는 며칠 앓아누우니 마음 쓰지 마시오
노인은 손때 반질반질한 툇마루 기둥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비바람이 불 때마다 기둥 못에 걸린 우의에서 비늘들이 떨어진다 아침에 방을 빼겠다고 하자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는 노인, 굽은 등으로 지느러미를 세우고 가물치 반점들이 돋아난 얼굴로 나를 골똘히 쳐다본다
--- 「나루터 민박집」 중에서
어디서 왔느냐,
흰 달에서
흰 더위에서
흰 무덤 하나 물고
낮게 낮게 날아가는
뜨거운 새여
--- 「배롱나무 흰 꽃」 중에서
능소화 핀 담벼락 아래
폐지 실은 손수레가 멈춘다
부채질 긴 한숨에
꽃송이마다 울리는 트럼펫 소리
옆구리에 성경을 낀 말러가
천국의 음악이라고 설교한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들 내외는 타지에서 죽은 지 오래
손주는 한 달에 보름은 가출
너무 멀리 있다고, 천국은
--- 「말복」 중에서
푸석한 슬레이트 지붕골은
등에 곰방대 꽂고 콜록대는
구판장 할배 늑골처럼 보여
소년은 누워도 낮잠이 오지 않았다
돌담에 벗어 놓은 구렁이 허물에
쉬파리가 뒤덮으면
묘지들이 널브러진 빈약한 숲에서 뭣을 빨았는지
화분을 잔뜩 묻혀 온 꿀벌이
별안간 울음 터뜨린
소년의 정수리에서 날아올랐다
--- 「밀원」 중에서
가혹한 형벌은 아닙니다 척박한 땅도 아닙니다 지평선 너머 오아시스가 얇게 떠오르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가끔 카라반 행렬이 지나가지만 낙타도 사람도 자기 그림자 속에는 숨을 수 없는 운명인지라 타인의 불행에는 무심합니다
--- 「내력」 중에서
뿌리를 땅속에 두고 온 나무
여물을 먹다가 끌려온 가축
가운데 움푹 파인 도마 분화구에
건기를 건너온 쓸쓸한 식욕들이 모여든다
생의 대부분 먹고사는 일에 보내야 하는
숨의 운명, 수북이 쌓인 내장
씹을수록 텁텁한 어둠은
또 다른 내장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간다
--- 「순대 타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