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는 곳에서 자신의 당위와 무결함을 확인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함께 발을 디디고 있는 땅에서 합의점을 찾아내고 각자가 꿈꾸는 사회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고 상대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오답일 수도 있는 상대의 생각 자체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령 오답이라 할지라도 그가 왜 거기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내 의견을 더 잘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1쪽)
상대를 납작하게 바라보게 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하나의 기준으로만 형성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도 자기 부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입장이 다 중요하고 세상에 옳은 입장이란 없다는 상대주의를 표방하려는 것도 아니다. 맥락과 시대를 초월해 절대 선을 내세우는 일은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더 나은 선택은 있다고 생각한다. (33~34쪽)
맞다. 세상엔 ‘다른 선택’이 아니라 ‘틀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양비론은 언제나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점점 더 그 ‘틀림’을 몰아세우고 조롱하는 방식만을 발달시켜 가는 것 같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의 오류를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류를 몰아세울수록 악에 받쳐 극단적인 선택을 향해 움직이는데, 문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결국에는 그러한 선택이 만드는 세상을 모두가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 ‘틀린 사람’이란 표현 안에 계속해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면 잠시만 멈춰보자. 그 안에 나와 당신이 포함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 (34쪽)
계급 이동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사회만큼이나 가진 것이 없는 삶도 비참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나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참한 삶이 다수인 사회는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스펙터클은 감상하는 사람과 그 대상이 분리되어 있을 때 쾌감을 주지만, 같은 땅을 디디고 사는 타인의 삶이 온전히 나와 무관할 리가 없다. (188쪽)
숫자만 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사고실험이 아닌 실제 삶 속에서 무지의 장막이란 말은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가림막을 가리킬 때 더 잘 어울린다. 그 가림막을 들추고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287쪽)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이들의 양심을 발견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지나친 확신을 경계하면 된다. 단일한 기준과 절대적 진리를 외치는 목소리 앞에서는 한발만 물러서서 들어보는 습관만 가져도 좋은 이야기를 가려낼 수 있다. 나에게 편안하고 내 생각을 강화해 주는 이야기 너머로 눈길을 한 번씩 돌려보는 것, 그 작은 습관이 많은 것을 바꾼다고 나는 믿는다. (290쪽)
정치의 언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감정과 표현을 반영하고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선진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문화 엘리트들에게 반감을 갖게 된 이유는 자신들의 삶과 언어가 반복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는 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침내 온라인에서 발언권을 얻은 뒤 그곳에서 자신들과 같은 목소리를 만났고, 자신들에게 ‘인정’을 공급해 주는 정치를 향해 결집했다. 살아온 삶과 언어를 계속해서 부정당하고 교정당해야 하는 계몽주의를 따라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찾기 어렵다. (326쪽)
일상에서 사람들은 논리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느껴지는 관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상대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더 큰 설득력을 갖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논리를 펼치느냐보다는 나의 마음과 경험을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 우리가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3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