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미순 시인은 부산에서 출생했고, 2022년 『애지』로 등단했다. 이미순 시인의 첫 시집 『날마다 두 개의 자화상을 그린다』는 ‘만상(萬像)의 관계학’이라고 부를 수가 있으며, 우리는 그의 시들을 통하여 인간의 사회성과 고유성, 그리고 존재의 성향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짝꿍과 재혼한 순희는
짝꿍이었던 상민이를 석래 아부지요! 하고 부른단다
100미터 길이의 비닐하우스 일곱 개에 특수작물과 딸기를 재배하는데
석래 아부지는 술을 달고 산단다
환기창을 열다가 한 잔, 목마르다고 한 잔, 출출하다고 한 잔
해거름이면 만취가 된단다
시원하게 잘 웃는 순희는 그런 석래 아부지가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이었지만
일 마치면 꼭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석래 아부지 허리춤을 잡았단다
그날도 귀갓길에 강둑을 달리다가 오토바이가 굴렀는데
둘이 널브러져 있다가
괜찮나?
상민이가 순희를 와락 끌어안았단다
그 바람에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순희가
석래 아부지에게 취했단다
절뚝거리며
다시 오토바이 뒷자리로 가
석래 아부지 허리춤을 더 세게 끌어안았단다
- 「취하다」 전문
상극이 보합(補合)하여 궁합이 되는 이 놀랍고 유머러스한 지경은 반목과 갈등이 일상화되는 우리의 흔전만전한 만남 위에 인연의 지긋한 눈길이 있음을 똥기듯 선사한다. 더구나 더 재미있는 것은 삶의 주변에 있는 사고의 표면적인 산문성을 그 내막을 시적 해석으로 입체화시킨 이미순만의 너스레와 전환된 운문성(韻文性)에서 찾을 수 있다. 취(醉)함과 취(趣/取)이 격절하지 않고 하나로 연계되고 습합되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에피소드가 이 시편에 돌올하니 관계의 의미를 흥미롭게 톺아보게 한다.
이 시적 서사(敍事)의 전후관계는 일상의 불상사가 오히려 불행으로 귀착되지 않고 전환의 화해로운 변모를 양산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귀갓길에 강둑을 달리다가 오토바이가 굴렀”고 그리하여 “둘이 널브러져 있다가” 무슨 서슬엔지 “상민이가 순희를 와락 끌어안”는 전차를 통해 “그 바람에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순희가/석래 아부지에게 취했”다는 인간적 동화(同化) 내지는 부부 금슬의 끌밋한 상호 동조(同調)를 찾았다는 점이다. 소위 전화위복이라는 말로는 일반화시킬 수 없는 만남의 여사여사한 곡절이 입체감있게 지어내는 상보적(相補的)이고 해학적인 너름새와 그 관계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는 이미순 시인의 남다른 눈썰미로 관계의 곡절이 지닌 너그럽고 늡늡한 인간미에의 발견으로 그 만남의 층위(層位)를 격상시키는 부부의 내밀함을 간과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만남은 한순간의 만남의 홀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만남의 파장이 여러 겹으로 지속적인 관계성과 영향력을 통해 중층화(重層化)시킨다. 이것은 곧 하나의 만남은 한 번의 만남이 아닌 존재의 다발을 엮어내는 불가적으로는 연기(緣起)의 에너지를 함축하고 발산하는 과정이자 변화임을 암시한다.
남편 대신 처방약 받으러 갔다가
의사를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어디서 봤더라 / 어디서 봤더라
의사도 내가 낯이 익은지
처방전을 쓰면서 안경 너머로 자꾸 나를 쳐다본다
청소년 자원봉사를 하시나요? 아니요
음악연주 봉사는요? 아니요
심리상담 봉사? 아니요
춤 동아리?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를 외치며
기억 속 일상을 거꾸로 돌리다 보니
아하! 매일 오후 6시 30분
수영강습 연수반
내 앞에 있다가 접영 때만 되면 내 뒤로 빠지는 사람
수경을 끼고 인사하는 사이
어제도 마주친 사이
의사 가운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게 하고 안경을 벗기고
수경을 수모 위로 올리면?
영락없다
처방전 건네면서
생각났냐는 의사의 말에
아니요 아니요 를 되풀이했다
- 「아니요」 전문
우리의 만남은 스침의 반복 속에서 되살아나는 본격적인 관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만났으나 제대로 만나지 않고 스쳐갈 수밖에 없는 바쁜 일상과 관성적인 모임에의 참여는 간과(看過)된 존재들로 살아가게 한다. 숱한 장소에서 마주쳤음에도 화자가 "남편 대신 처방약 받으러 갔다가" 보게 된 "의사"는 "어디서 봤더라" 하는 기시감(deja vu)이 들게 된다. 의사 또한 낯이 익은 듯한 화자를 향해 다양한 모임의 이름을 대면서 그 접점(接點)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만남의 근거를 향한 모색이 새삼스러운 바쁜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남이란 이렇게 존재와 존재가 함께 할만한 일종의 동행의 준거(準據)를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소소한 노력들을 통해 상대방과 내가 "영락없다"라는 확신의 기억을 갖는 것, 비록 “아니오 아니요”를 되풀이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어(irony)의 차원을 넘어서 자타(自他)가 공히 존재하는 내밀함에 닿으려는 노력의 경주로 읽힌다.
무엇보다 이 시편의 제목이 갖는 강조점과 중의적(重意的)인 성격은 우리의 도시적이고 습관적인 만남의 실체에 대한 은밀한 비판을 통해 진정한 만남의 의미를 묻게 한다는 점에 방점이 있다. 앞서 화자가 반복한 “아니요”가 아닌 진정한 “그래요” 나 “예”라고 하는 긍정에 닿기 위한 과정의 종요로움은 다름 아닌 생동하는 만남을 통한 자각(awareness)의 입장을 갖는데 있다. 변모하는 상대의 실체일망정 그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단순한 외모의 특징을 넘어 내면(內面)으로까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어쩌면 숱한 스침과 접촉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본령에 가닿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순 시인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로서 타인을 바라보는 관성적인 삶의 분위기를 우선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 존재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의 배려나 관심에 대응하는 인간의 예의에 관한 입장에서도 무람하지 못한 경우이다.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우리의 만남에 있어 그 관계가 갖는 징후나 증상만 있고 처방이 없다면 그 만남이란 무망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꼭이 무슨 효험만을 바랄 수는 없으나 인간은 만남을 통해 일정 부분 혹은 상당한 존재의 의미를 견인하고 삶의 유의미함으로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감이 견인되지 않는 만남이란 이미 숱한 접촉이 전제되거나 성행했음에도 의미와 교감이 없는 삶의 징후(symptom)로 망각되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니요”는 “그래요, 맞아요”를 성립하기 위한 방법론적 부정의 철저함일 수 있다.
당신이 엎질러졌습니다 엎질러짐은 나를 펼치려다 일어난 일입니다 헛디딘 일입니다 엎질러진 일이 꼼지락거리자 그 사이로 당신이 보입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 사이를 벌려 봅니다 오늘이 분주해도 엎질러진 일입니다 잠시 없어질 일들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소홀을 이제는 당신의 소홀을 위해 소홀해지겠습니다 발꿈치는 놔두세요 들어 올린다고 엎질러진 일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두 개의 자화상을 그린다
배시시 웃는 빈 안간힘이 보이지 않으세요?
- 「배시시 웃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