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풀 수 없는 응어리 같은 흔적
삶을 끌고 가는 힘
허정분 시인의 첫 시집 『벌열미 사람들』 이후 20여 년이 흘렀다. 그간 시인에게 시란 풀 수 없는 응어리 같은 흔적을 기록하는 행위이자 쉼의 망중한이었다.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을 기꺼이 끌어안은 시인은 시나브로 잊히는 기억을 삶을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렇게 쓴 시를 모아 여섯 번째 시집 『어느 아낙의 병풍도』를 출간했다.
시집은 60여 편의 시가 ‘꽃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사당이 있는 집’, ‘별자리에 너를 누인다’,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4부로 나뉘어 있으며 시 산문집 『그곳에 그리움이 있었다』를 펴낸 후의 소회를 담은 작가의 산문 한 편이 실려 있다. 시인은 역사를 시로 기록했다. 600년을 이어온 문중 마을의 풍속도(「사당이 있는 집」, 「반세기」, 「큰산소」, 「백인대 연가」 등)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시는 일상에서 지나온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기록한 시다.
태생부터 가난과 운명을 같이한 기억, 흙 위에서 호미 들고 머문 시간, 아픈 혈연들의 상처와 어린 손녀가 하늘의 아기별이 되어 이별한 설움까지 삶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가슴 저릿하다가도 유쾌하게 와닿는다. 첫 시집을 펴낸 지 20여 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을 펴낸 시인은 여전히 문학이란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울렁거린다고 말한다. 『어느 아낙의 병풍도』는 칠십 년 한 생애, 그 세월의 파편을 시에 온전히 담아낼 줄 아는 어느 아낙의 흔적이다.
책 속에서
다 어디로 사라져 갈까.
시나브로 잊히는 기억들이 삶을 끌고 가는 힘이다.
대신 노년이란 삶의 과제가 따라왔다.
당연한 그 세월의 파편들이 내 몸의 중심이고 중독이란 걸 알았다.
첫 시집 『벌열미 사람들』 이후 여섯 번째 시집 『어느 아낙의 병풍도』를 문집의 이력에 넣는다.
내가 심은 작은 텃밭의 푸른 생들 앞에 호미를 들고 머무는 시간은 움직이는 중독이다.
풀 수 없는 응어리 같은 흔적을 기록에 남기는 행위는 쉼의 망중한이다.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 기꺼이 끌어안고 가겠다.
--- 「머리말」 중에서
설 명절 앞둔 대목 장날 장터에 편 점포마다 손님 끌기 바쁘다 손끝이 시린 추위 예전의 호황은 별나라 이야기라고 쓴웃음 파는 몇몇 장꾼은 모닥불 앞에 모여 커피를 마시고 꽝꽝 언 동태를 흥정하는 늙은 부부 이웃 만나 짜장면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삼대가 모이는 명절 입맛 다른 어린놈들 먹거리 짊어진 가방 메고 기다리는 마을버스, 단골손님마다 주름진 훈장들을 온몸에 달고 있다 젊은 시절 우리 집 구멍가게 술꾼이던 주태백 아저씨 십수 년 세월에 이름 잊은 농투성이 남정네 건네는 눈인사에 취기가 엉겨 버스 기사와 말 대작을 한다
- 이 차 우리 집 가는 찬가,
- 글쎄, 우리 집이 어디요,
- 아 만뜰 봇도랑 옆이여,
- 아저씨 만뜰은 다른 차요,
- 어라 만뜰을 안 가믄서 왜 날 태웠어,
- 아따 아저씨가 탔지 않았소,
- 예끼, 차비 받아묵고 뭔 뚱딴지 소리여,
- 딴지는 아저씨가 걸면서 술은 얼마나 자셨소,
- 자네가 술 사줬나 막걸리 두 병이면 만땅이여,
빨간 딸기코로 술 트림 횡설수설 맞장구치던 기사 양반 출발도 안 한 버스 시동 끄고
- 아저씨 집에 다 왔으니 내리소,
- 이 사람 만뜰 말고 세월리에 내려주게,
- 아니 만뜰 사람이 세월리는 왜 가소,
- 아 벌써 집에 가 뭐하노 술 한잔 더 묵어야제,
- 아저씨 그럼 내리소, 차비는 안 받을 테니,
- 예끼, 다 왔다고, 그럼 한잔 더 하고 걸어가지 뭐,
주당 어르신 구름 속에 숨는 햇살 붙잡고 쓰는 갈之자걸음이 충청도 집 문을 여는 대목 장날
--- p.50 「장날」 중에서
초저녁부터 청한 잠이 감감무소식인 불면의 밤 무심이 약이고 삶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도 기어이 수면제 한 알을 처방하는 새벽녘, 옆집 농가의 수탉이 울고 약 기운에 심신이 서서히 뭉개지는 나른함과 일상을 깨우는 습관이 줄다리기하는 비몽사몽의 행간이다
문밖은 지금 정월의 한파가 눈보라를 몰고 오는 대한 무렵, 유전으로 물려받은 저기압의 기상도가 내 몸을 휩쓴다 밥벌이로 나간 여덟 시간 품값의 최저임금, 그 일도 볕 좋은 날의 마른장마처럼 드물고 잠자리 즐거운 상상을 깨는 불안은 가슴속 어느 구석에 붙어 있던 흔적인가 섬망 같은 환각이 세포들을 깨운다
이런 일 한두 해를 넘겨 익숙한 불면인데도 속절없이 오늘을 보내야 할 시간의 그림자들이 미리 와 버려 굽은 곡선으로 누운 몸의 피로 눈꺼풀에 달라붙어 곡소리를 낸다
한 생의 노동자가 짊어진 살아갈 괴로움을 어디다 호소해야 면죄부를 받을까 길고 긴 하루가 시나브로 졸기 시작한다
--- p.66 「잠 못 이루는 밤」 중에서
아우야 너 지금 어딜 가니?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가는 거냐?
아직 네가 가기엔 멀고 이른 길이란다
넋두리가 곡이 되고 후회가 눈물이 되던
막냇동생 영정이 놓인 장례식장
사진 속 환한 얼굴이 누이를 반기는데
이게 뭔 변고일까
작년까지 무쇠 팔다리로 져 나른 공사장
흙먼지가 폐암 말기 부고장이었구나
한 조상의 혈연을 죽어서나 보는 아우야
사촌들도 오고 벗들이 오고
네가 사랑하던 아들도
큰형과 누이도 왔다
머나먼 하늘과 땅 교차로에서
꺼이꺼이 호곡으로 너를 부르며
서로 지녔던 기억과 추억을 꺼내는데
착해서 바보 같던 아우가
법 없이도 살던 내 아우가
살아서 못 가 본 외진 길을 간다네
복사꽃 핀 언덕 진달래 핀 산길에서
누이 기다리겠다고
만장 앞세우고 훠이 훠이
하늘로 가는구나
--- p.76 「별자리에 너를 누인다」 중에서
시를 쓰기가 무미한 나이가 되었다
한 문장 쓰기가 이토록 건조하다니
시인이란 호칭이 무색할 지경이다
서너 달 동안 시퍼렇게 너울거리던 무밭이
된서리 두어 번에 말랑하게 풀이 죽었다
밭이랑 사이사이 꽃대를 밀어 올리던 진득찰도
누렇게 시들어 간다
나와 무와 진득찰의 사이가 건너가는 시간
곧 잊히는 시절이 올 것이다
--- p.112 「무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