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이중도는 행복한 시인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귀향을 실현하였다. 대다수 시인들이 고향을 상실하고 노스탤지어를 앓거나 방황하며 소외와 분열을 말하는 시대에 그는 고향을 노래하는 우리 시의 희귀한 개성이 되었다. 불혹의 나이에 통영으로 회귀한 그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변화하는 고장의 구체적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때론 사라지고 잊힌 일들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풍경과 합치하고 동일성을 얻는 깊은 기쁨을 누렸다. 이제 지천명이라는 오십을 훌쩍 넘기고서 유소년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어 벽화를 그리고 이야기하며 노래로 읊는 장대한 작업을 개진하였다. 때론 시원의 신화에 이르기도 하고, 비의를 품은 전설을 끄집어내는 한편, 소소한 삶의 즐거운 일화들을 생동하는 리듬에 실어 이어간다. 풍경이며 사물이 그저 대상으로 나뉘지 않고 죄다 긍정과 가능성의 힘으로 존재를 이어 주고 이끄는 사건으로 비약한다. 누구도 이중도의 시편이 환기하는 신비의 매혹에 이끌리지 않기 힘들 듯하다. 그 울림과 반향의 여운이 길게 마음속에서 요동한다. 그가 형성한 행복의 시학이 빛나는 모습이다.
― 구모룡(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그 시절, 고향은
코끼리 귀만 한 이파리들 무성한
두 아름 무화과나무였다.
나는 한 마리
유별난 장수하늘소였고
흙과 시詩는
일찍이 정해진 운명이었다…….
고향이 썼다.
책 속에서
<그 달이 시를 쓴다>
그날 그 달의 살냄새에, 흙집에 고둥처럼 깃들여 사는 사람들이 모두 바닷가로 나왔다 이미 단풍이 든 늙은 살구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벌레 울음소리가 소낙비처럼 번졌다 우리를 부수고 나온 돼지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녔고 시집도 안 간 처녀들이 임신을 했다
장대로 높이뛰기를 하면 손에 닿을 거리까지 내려온 달이 거대한 술잔 속 바다에 달빛을 흩뿌리자 해저에서 검은 준마들이 천천히 움직였고 연안 구석구석에서 발기된 배들이 밧줄을 풀고 슬슬 나왔다
오직 팔의 힘으로 움직이는 순박한 목선들, 물고기와 조개를 싣고 다니는 중세 농노 같은 목선들이 머시마들을 가시내들을 태우고 달이 만들어 놓은 마당에 모여들었다
모인 배들은 얼마 동안 배다른 수캉아지들을 한곳에 몰아넣어 둔 것처럼 서먹서먹한 표정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가시내들의 노랫소리에, 가시내들 입을 통해 부르는 달의 노랫소리에 서열 가리지 않은 수컷들로 돌변했다 시키지도 않은 힘자랑이 시작되었다 멀리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섬을 향해 경주가 시작되었다
달리는 배 하나하나가 튼실한 양물陽物들!
높아져 가는 노랫소리에 점점 더 싱싱해지는 양물들!
시거리 두른 양물들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뿜을 때마다, 대가리로 파도를 부술 때마다 갯벌에 다리 박고 머리만 내놓은 하마들이 입을 크게 벌렸다 수면에 붙어 잠자던 고래들이 꼬리지느러미를 들어 올렸다
잘피 숲에 둥지 튼 붙박이들의 꿈을 박살 내며 먼저 닿은 배는 모닥불을 피워 승리를 자축했고 나머지 배들은 풀이 죽어 달 아래로 돌아왔다 하마들은 다시 피가 굳어졌고 고래들은 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달빛!
넓게 쳐 놓은 그물에 걸린 억만 전어들이 물 위에 떠올라 파닥거리는 것처럼
물결에 부서지는 달빛에 저절로 점화되는 노래들
상수리나무 빽빽한 숲 기슭에 박혀 있는 하얀 이끼 두른 바위들을
허공에 밀어 올려 춤추게 하는 우리의 노래들
다시 죽순처럼 부풀어 오른 배들은 몸속의 노래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내보낼 때까지 달빛 마당을 돌고 또 돌았고 속을 깨끗이 비운 배들은 하나둘씩 둥둥 떠올라 달 속으로 사라졌다
배들이 다 사라진 후에야 달은 마당을 걷어 가며 만삭의 몸을 이끌고 서서히 서쪽 하늘로 떠났다……
떠나간 그 달이, 돌아올 수 없는 그 달이 시를 쓴다
텅 빈 달 아래 앉아 텅 빈 마을 바라보며
여자들의 꼿꼿한 뼈대들이 불알 까 버린 토끼들을 몰고 다니는 자전거도로를 걸어 다니며
그날 그 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