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건, 어쨌든 도리 없는 것
나는 좋아진다, 함께라는 말이
1학년 6반, 2학년 7반, 3학년 1반, 4학년 9반(171쪽), 교실의 크고도 무겁던 검붉은 나무 뒷문, 그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가는 작디작은 나(「선생들」). 그때의 그 길과 낮잠과 풍경 그리고 냄새를 소환해보면 허기졌던 그날의 내가 보인다(「무진장」). 삶은 관계의 실타래 같아서 묶음의 형태로 그 궤를 짐작할 수도 있기에 그것을 작고 단단한 얌체공처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121쪽) 그다.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건, 어쨌든 도리 없는 것(「녹두와 나비」). 그렇게 어떤 존재가 눈과 마음에 들어와 우리는 가족이 되기도 한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도 한두 번 둘러보고 싶은 집들이 있다(「내가 오뱅이었던 때」). 무소식이 희소식인 양 잊고 살다가 목소리만 들어도 많은 걸 헤아릴 수 있는 사이. 첫마디가 모해용, 이면 별다를 게 없다는 뜻이고 형, 하면 나는 왜? 뭔데? 하며 조바심이 나는(「P에게」) 관계. 다시 불러도 애먼 곳을 한참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는 그 무심함 속에 내 발끝에 매달린 고독은 따뜻하다. 나는 좋아진다, 함께라는 말이(62~63쪽). 중불과 약불 사이 그 정도로 익혀야 하는 닭다리살 구이(11월 4일 레시피)처럼 무례하지 않은 적당한 거리(191쪽), 보이나 가늠할 수 없는 거리(179쪽)가.
애썼다는 말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었다
볕에 익어가는 짚풀처럼 오는 마른 가을. 고통을 많이 배우면 쉽게 용서하게 된다(「예보」). 여러 번의 겹칠에도 결국 어두운 일은 어려운 색으로만 보이는(46쪽) 겨울의 길목. 시인에게 행복은 찰나 같고 불행은 불가피한 것. 행복은 풀숲에 숨겨진 어린 날의 보물찾기, 그에게 보물이 적힌 그 쪽지가 발견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엔 애썼다는 말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었다(「멀리 있는, 다시 없을 너에게」).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당면을 넣은 단순한 국. 엄마가 엄마의 엄마에게서 배운 국은 그리 특별하진 않았지만 밖에 나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시답잖은 핑계를 둘러대며 그만 일어나려고 하는 시인을 밥상머리에 주저앉히고 마는 엄마의 당면국(11월 22일 잡문). 어쩌면 이 아늑이 아련하게 비벼져 물컹물컹 입안에 담기는 순간, 그는 함부로 기도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며, 오직 자신을 믿으며 사랑을 게을리하지 않는 어른의 마음을 배웠던 건 아닐까(11월 24일 편지). 꼭 옳지 않다 해도 어떤 실수를, 한때의 그릇된 시간을 살포시 안아주는 마음(120쪽)을.
자정을 알리며 자명종이 울렸다
그러니까 꿈이라는 거지?
다 큰 놈이 운다고
방문을 크게 닫는 가족
문이 열릴까,
어째서 문은 다시 열릴까?
말없이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_「스멀스물수몰」 부분
책 속에서
골똘히 아픔을 보면 죄다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요, 저라고 다를 바 없이 병 주고 약 주던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부끄럽지만 살아가고 있고 아직 용서하지 못해 살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사람을 멀리한들 완치가 있을 리 없고 사람의 일에 아픔이 배제될 수도 없으니 면역 없는 사람을 우리는 겪어내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외롭게 건강했으면 합니다.
―「골똘히 아픔을 보면 죄다 사람의 얼굴」 부분
한때 내가 오뱅이었을 때, 너희에게도 근사한 별명들이 있었다. 여전히 유효한, 아니면 불행히도 기한이 다한 그 값진 별명들에 경의를 표한다. 지금은 아니라 해도 남달랐던 시절마저 절연한 적 없으니 모름지기 누구와도 추억은 근친이다.
―「내가 오뱅이었던 때」 부분
나는 가만히 나비 눈앞에 내려앉아 감긴 목줄을 풀고선 그 가는 목을 오래도록 쓸어주고 싶다. 이제라도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날아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작고 소중한 너를 한없이 쓸어내려주고 싶은 마음, 사랑이 아니라면 어느 별에서나 볼까.
―「녹두와 나비」 부분
날이 선 백지를 천천히 넘기다 결국
맨 뒷장에 하나 적게 되는 것이다
이름이 필요한 이유다
일기를 적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많이 배우면 쉽게 용서하게 된다
문간의 제웅처럼 말 없는 네 입속에 고통을 적어넣는다
헤진 눈이 검게 흐른다
실선을 이어붙이면 절취선,
진눈깨비가 사방을 홀리고 있었다
―「예보」 부분
화원은 메말라 있고
화원火源은 누구인지 모른 채
들녘이 있는 도로를 가로지르면 멀리 불타는 냄새
가을도 아닌데 벌써 난
그 냄새가 좋은 거다 답답해,
네 가슴을 때리며 죽을 것 같아 당신은 말했지
안아달라는 말이 아니라
떠나달라는 말도 모르게
가을이 오겠다
―「벽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