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묵상에 잠긴 겨울 산에는 가깝고 먼 소리가 들려온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칼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린다. 바람은 크고 작은 나뭇가지에서, 산 능선을 넘어 골짜기 계곡을 휘돌아 가면서, 소리를 낸다.
--- p.15
계절이 바뀌고 첫눈을 맞이하는 벅찬 감동은 설렘처럼 가슴속에 와닿았다. 그러자 습관처럼 급히 생각나는 담배를 움켜쥐고 흡연실로 들어섰다. 흡연실에는 어느새 첫눈을 벗 삼아 담배를 즐기는 직장 애연가들이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 개비를 꺼내 라이터 불에 붙였다. 첫 모금 깊게 빨아 마신 연기를 뿜어냈다.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실선들이 곡선, 원, 반원들을 파르라니 그리며 허공으로 흩어진다.
--- p.42
그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데, 이 순간 시간은 머물고 있을까? 시간도 쉬어 가는가? 그 여인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흐르고 있었단 말인가? 또다시 자문해 본다. 미라로 수백 년이 흘렀으나, 이 자리에 다소곳이 누워 있는 젊은 여인. 아니, 시간의 길고 짧음을 어떻게 해석할까? 나는 현재가 과거인지, 과거가 현재인지 갈음할 수 없는 꿈속에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 p.72
물에 빠진 생쥐마냥 빠져나온 나, 아니, 똥물에서 빠져나온 나를 보더니 허연 수염의 노인은 어이가 없었는지 밀짚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다가 나를 보고 “허허, 참!” 쓴웃음을 지었다.
--- p.111
너럭바위에는 나 혼자 앉아 있다. 방금 옆에 앉아 있던 월명사月明師 스님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달빛을 받으며 숲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아무도 없다. 달빛 바람만이 천년의 시어詩語를 들려주는 듯했다.
--- p.141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에 반쪽도 아닌 멍청인가
빈 호주머니를 쥐고 당당히 가고 있다
끝 다는 길에 서서 이 세상 몽땅 호주머니에 넣고 가고 싶다
이 사람이나 저 멍청이나 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 삶이 즐겁다 힘들다 하고 그저 그렇다고 웃으며 가고 있다
가는 길이 고달프냐 말하지도 않고 듣지 않느냐 아무것도 모르는데
--- p.170 「멍청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