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유한 속의 무한, 끝나지 않는 여름
- 장은영 시집 『몇 번의 여름』 해설
강영은(시인)
장은영의 시집 『몇 번의 여름』은 상실과 재생의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시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어떤 사람들에게서 버려지고 어떤 사람들을 버렸다”고 고백하며, 인연의 길이에 운명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이처럼 관계의 단절과 지속에 대한 통찰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로 자리하며, 버려짐의 쓸쓸함과 그 후의 평온함까지도 담담히 응시한다. 실제로 시인은 “마음이 비어 쓸쓸했고/ 마음을 비워 평온했다”-고 말하며, 끝나지 않은 나날 속에 새로운 만남을 맞이할 용기도 얻게 되었다 밝힌다. 이처럼 이 시집은 이별의 아픔을 사유와 성찰로 승화시킨 한 편의 서사가 되어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 시집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각 부가 ‘공간’ ‘시간’ ‘인간’ ‘그리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시인이 우주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거쳐 인간의 내면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열려 있는 ‘그리고,’의 여운으로 우리를 안내함을 암시한다. 공간과 시간처럼 거시적인 차원에서 출발한 시선은 결국 인간의 보편적 경험(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으로 수렴되며, 마지막의 ‘그리고,’는 완결되지 않은 생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계속됨을 시사한다. 이렇듯 치밀한 형식적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시집의 흐름을 하나의 여정처럼 느끼게 한다. 이제 이 시집에 담긴 핵심 주제와 미학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한다.
시간의 순환과 관계의 성찰
『몇 번의 여름』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통찰이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몇 번의 여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군가 물었지
당신의 여름은 몇 번 남았겠느냐고
무성한 계절이 다가오면 저무는 방향을 잊곤 하였네
마지막 여름이면 무얼 바라야 할까
오오, 미루어 둔 끄트머리 것들 좀 봐
먼저 흐려진 눈물샘을 둥글게 끌어안고
버려도 좋다고 웅성거려온 내밀한 소음을 해제하여
압축된 기억들이 숨 쉴 수 있도록 수락한 뒤
몇 개는 홀씨 같은 조바심 위에 몽긋몽긋 내려앉게 도와야겠지
치열할 따름의 성벽 아래로 후미진 어딘가로 흩어지더라도
꽃이 될 심상은 미움이란 걸 모르고 자라
어둠은 환해지고
슬픈 잔상은 투명해지고
앓는 일에 골몰해온 환영마저 순한 입술을 닮아가겠지
그리되어야겠지 마지막은
마지막 여름이 오기 전에는
- 「몇 번의 여름」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당신의 여름은 몇 번 남았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다가올 마지막 여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한다. 유한한 시간에 대한 자각은 삶의 소중함과 남은 시간에 대한 숙고로 이어지는데, 시인은 미루어 두었던 감정들과 응어리진 기억들을 풀어놓고 “압축된 기억들이 숨 쉴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 나아가 슬픔과 미움 같은 부정적 정서를 놓아 보내어, 그 자리에서 꽃처럼 피어날 새로운 심상을 기대한다. 실제로 화자는 “꽃이 될 심상은 미움이란 걸 모르고 자라/ 어둠은 환해지고/ 슬픈 잔상은 투명해”진다고 노래하며,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결국 순한 사랑의 모습으로 변모하리라는 희망적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변용을 거쳐 “마지막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과정은,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삶의 순리와 치유의 메시지를 집약한다.
장은영의 『몇 번의 여름』은 개인적 상처를 보편적 예술로 승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시간과 공간, 인간의 내면을 아우르는 거대한 주제들을 자신의 언어로 포착하여,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낸다. 그 세계는 고통과 치유가 공존하고, 이별과 사랑이 순환하며, 현실과 철학이 만나는 자리이다. 시인은 자신의 문학 세계를 통틀어 삶의 진실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데뷔 이래 쌓아온 시적 내공이 집약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018년 첫 시집을 펴낸 이후 줄곧 “글을 디자인한다”는 평을 받아온 시인은 이번 작품집에서도 언어와 형식을 정교하게 디자인함으로써 내용과 형식 면에서 한 단계 도약한 미학을 선보인다.
무엇보다도 『몇 번의 여름』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학술적인 사유와 서정적인 감수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시 세계라는 점이다. 한편으로 장은영의 시는 삶과 인간에 대한 치열한 물음을 던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물음에 대한 시적인 위로와 해답을 제공한다.
“조바심을 버리고 능히 내달리지 말고 멈추지 않을 따름으로/ 순환을 거듭해 온 길/ 아린 달빛이 차고 이지러지듯 오래 품어온 내밀한 나의 무엇들 / 비우면 비워지는 대로 놓으면 흐르는 대로/ 마침내 절반의 괜찮음도 무결해지는 것이다// 무구한 반달이 회향한다”
- 「회향하는 달」 후반부
예컨대 「회향하는 달」의 마지막에 이르면 “비우면 비워지는 대로 놓으면 흐르는 대로/ 마침내 절반의 괜찮음도 무결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데, 이것은 집착을 버린 자리에서 얻는 평온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이자, 읽는 이에게 전하는 따뜻한 철학이다. 이처럼 이 시집은 삶의 끝없는 순환과 그 속에서의 해탈과 구원에 대한 시인의 독자적인 해답을 담고 있다. 따라서, 『몇 번의 여름』은 독자들에게 방향성과 여운을 동시에 안겨주는 작품집이다. 방향성이란, 이 시집이 우리를 상실에서 희망으로, 혼란에서 평온으로 나아가게 하는 정서적 궤적을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처음엔 아프고 쓸쓸하던 마음이 마지막엔 “꽃이 된다”는 식의 변증법적 전환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가능한 치유를 믿게 만든다. 이 시집이 마지막에 “그리고,”를 남겨두었듯이 완결되지 않은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시인은 마지막에 ‘바리데기 신화’를 불러내며 전체를 맺는다. 간절함과 무심함 사이에 문이 있다는 통찰,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용기는 순박하다는 진술은 곧 삶과 죽음을 모두 껴안는 태도로 읽힌다. 이는 시집의 첫 질문, “당신의 여름은 몇 번 남았겠느냐”에 대한 하나의 대답처럼 마음에 울린다. 여름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을 직시하고도 살아내는 일이 곧 인간 존재의 윤리임을 일깨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인의 말」에 가까운 울림이다.
“버려지고 버렸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버려지고/ 어떤 사람들을 버렸다/ 인연이 길이를 타고난다는 말이 참이길 바랐다/ 참이라면 덜 아프고 덜 미안할 테니// 마음이 비어 쓸쓸했고/ 마음을 비워 평온했다/ 끝나지 않은 나날에 누군가를 만나겠지/ 예전만큼 겁나지는 않을 것 같다”
- 「시인의 말」 전문
인연의 길이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덜 아프고 덜 미안할 것이라는 소망, 그리고 비워냄 속에서 찾아오는 쓸쓸함과 평온. 이는 시집 전체가 탐구해 온 존재와 시간, 관계와 죽음의 주제를 간결하게 압축한다. 따라서 “마름하며”는 단순한 에필로그가 아니라, 시집 전체를 관통해 온 사유의 응축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버리고 버려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남는 것은 쓸쓸함과 평온이 교차하는 마음의 질감이다.
이처럼, 장은영의 시집 『몇 번의 여름』은 삶과 죽음, 관계와 시간, 세계와 그 너머를 직조해낸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의 언어에는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예민한 촉수와, 그것을 감내하고 전환해내는 단단한 힘이 공존한다. 이 힘이야말로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위로와 성찰을 동시에 열어주는 원천이다. 언어의 실험, 이미지의 모험, 사유의 방향을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간다면, 시인의 여름은 계속될 것이며, 독자의 여름 또한 그 안에서 함께 이어질 것이다. 그 감동과 의미의 발견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시인의 말
버려지고 버렸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버려지고
어떤 사람들을 버렸다
인연이 길이를 타고난다는 말이 참이길 바랐다
참이라면 덜 아프고 덜 미안할 테니
마음이 비어 쓸쓸했고
마음을 비워 평온했다
끝나지 않은 나날에 누군가를 만나겠지
예전만큼 겁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