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함께 살아남는 생의 기술
1부 「아빠의 정원, 유풍농원 전말기」는 ‘유풍농원(裕豊農園)’이라는 공간에 대한 훌륭한 연대기이자, 시간 속에서 돌봄이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보여주는 뛰어난 서사시이다. 불 속에서 다시 뿌리내린 금계마을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벼농사 실패, 뽕나무밭 확장, 과수원과 관광농원의 흥망성쇠를 거쳐 마침내 몰락과 귀향, 재생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유풍농원은 세대를 잇는 삶과 기억이 포개진 공간이자 한 가족의 뿌리가 자라난 곳이다. 저자는 실패와 병마를 딛고 일어선 아버지의 삶에서 ‘함께 살아남는 생의 기술’을 발견한다. 지의류처럼 서로 기대며 버텨온 가족의 시간, 그 균형과 공생의 서사는 ‘정원’이라는 생태적 무대를 통해 인간의 회복력과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아빠는 한 사람 안에 있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에, 모두의 마음에 나뉘어 존재했다. 누구도 내색할 겨를 없이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누구도 전부를 감당하진 못했지만, 모두가 조금씩 애쓰며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하진 않았지만, 그 불완전함으로 서로를 붙잡았다. 누군가는 물을 길어오고, 누군가는 불을 지피고, 누군가는 말없이 곁을 지켰다. 우리는 늘 완전한 조화를 이루진 못했지만, 그 미묘한 균형이 무너졌을 때, 누구든 먼저 움직여 다시 삶을 붙잡았다. 마치 지의류가 그러하듯이. 햇빛이 없어도, 비가 없어도 잠시 멈췄다 살아가는 기술. 생의 낮은 온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익힌 생존의 방식은 바로,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함께여서 살아남는 삶, 그 방식은 서서히 자란다.
―「돌 위에 피어난 공생의 문장들」에서
농촌의 흙냄새와 삶의 이치
2부 「할머니의 정원 십계명」은 1928년에 태어난 이순복 여사의 삶을 바탕으로 머위, 쑥, 동백꽃, 잔대, 상사화, 방앗잎, 곤줄박이 등 열 가지 동식물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삶의 지혜를 십계명 형식으로 엮어놓았다. 각각의 계명에는 저자가 그린 동식물 세밀화와 할머니가 쓴 시 10편이 함께 실려 있다.
할머니의 시작품에는 한 세대의 노동과 사랑, 상실과 회복이 토속어의 리듬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할머니의 언어는 농촌의 흙냄새와 생의 이치를 품은 구전문학이자, 잃어버린 세대의 말과 손끝에서 탄생한 생활문학이다. 할머니의 삶은 한 그루 나무의 생애처럼, 흙의 품 안에서 끝없이 순환하면서 다음 세대를 품고 있다.
추운 겨울 얼어 죽을 동 말 동 살고 있으면 / 봄이 와 / 그때 자근자근 밟아 줘 / 보리싹이 자라서 키가 가슴께쯤 오면 / 보리 모가지가 올라오고 / 보리가 패서 알이 통실통실 여물 들기 시작해 / (…중략…) / 식구 많은 집은 참말로 / 보리 모가지로 살았어 / 안 굶어 죽을랑게.
―이순복, 「보릿고개」 부분
삶은 이어지고 생명은 자란다
이 책의 표지와 본문의 그림은 저자 정은희가 손수 그렸다. 유풍농원의 전경을 담아낸 그림은 한 가족이 4대에 걸쳐 살아온 땅의 서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생태지도’이다. 2부에 수록된 동식물 세밀화는 한 세대의 생을 상징하는 잎맥과 꽃잎의 결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정원은 우리가 돌보는 곳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돌보는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유풍농원에 산다』는 ‘유풍농원’의 흥망성쇠와 한 가족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면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삶을 제시하는 책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정원의 역사에 대한 면밀한 기록을 통해, 세월이 흘러도 삶은 이어지고 생명은 자라고 사랑은 소중하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저자의 말
“우리 집은 33년째 유풍농원이다.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갔다가 서른다섯 살에 돌아온 고향에서 마흔아홉 살이 되었다. 고3인 건우는 세 살 때, 고1 범우는 백일 무렵부터 이곳에 살았다. 이 책을 쓰면서 아빠가 만들고 할머니의 지혜가 새겨진 유풍농원을, 가족과 함께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 굳어졌다. 유풍정원만이라도 가족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풍농원의 풍경은 가족사와 얽혀 달라진다. 나는 이곳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 정원과 연못, 집과 밭과 묵정지, 산에 사는 것들을 목록으로 남기고 싶다.
유풍농원 전성기는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1990년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가족이 정원을 돌보고, 밭에서 딴 상추 한 소쿠리를 테라스 식탁에 올려놓고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지금도, 우리는 유풍농원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