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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부 녹색 광선
녹색 광선
구두 한 짝
로드 킬
살아남기
갈치
담쟁이의 발
선천적 결핍
희망
해바라기

2부 시원섭섭, 시원섭섭
더빙이
슈퍼문이 뜨는 밤이면
경계
명과
그리고 그때
쌀바위
집
집을 팔았네
눈, 뜨고 있는
예감

3부 고요는 보내고 소란은 걸러낸다
개옻나무 저 혼자 붉어
무
물음표, 느낌표
배롱나무
살구
발
작은검은꼬리박각시나방
다시 듣고 싶은 소리
얼음의 역사
고래가 전한 이야기
겨울 산에서 하늘과 악수하기
화요문학이 있었다

4부 마침내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도착했다
도요지
폐가와 산수유나무
미황사
마침내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도착했다
직립
목련 편지
고원의 바람
신의 나라
저자 소개
저자 : 송은숙
2004년 《시사사》 신인상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2017년 《시에》를 통해 수필가가 되었다.
시집으로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만 개의 손을 흔든다』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산문집으로 『골목은 둥글다』 『십일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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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신발, 하면 고흐의 그림이 떠오른다. 고흐는 구두를 주제로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낡고 흙이 묻어 더러워진 농부의 구두이다. 구두는 신발 끈이 풀렸거나, 발이 들어가는 입구가 늘어졌거나, 바닥을 위로 하고 뒤집혀 있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구두 주인의 삶의 무게나 노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그 구두 그림을 보고 “우리는 이 구두를 통해, 농부 여인의 고단한 삶, 그녀의 걸음, 들판의 땅, 비와 바람, 외로움, 생계의 투쟁을 느낄 수 있다.”라고 하여, 그림이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서, 존재의 진리(Sein)가 드러난다는 철학적 논지를 끌어냈다. 신발은 우리 몸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며 노동과 이동을 통하여 우리 존재를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19쪽

하지만 흙이 되지 못하는 죽음도 있다. 아스팔트 위에서 가끔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을 본다. 고양이가 눈앞에서 치이는 걸 두 번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저 앞에서 검은 물체가 하늘로 솟구치다 떨어지던 장면. 그 고양이는 두어 번 뛰어오르다 잠잠해졌다. 그리고 한번은 내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다. 길을 가다 깡통을 머리에 뒤집어쓴 새끼 고양이를 보았다. 아마 깡통 안에 든 찌꺼기를 먹으려 하다 머리가 낀 모양이다. 고양이는 앞이 보이지 않아서 위험한 차도를 이 리저리 가로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마침, 내 옆에 왔길래 깡통을 벗겨 주었는데 놀란 고양이가 찻길로 뛰어들어 그만 차에 치이고 만 것이다! 찰나의 일이다. 그때 깡통을 벗겨 주지 말아야 했나?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야 했을까? 물론 고양이를 꼭 붙들고 벗겨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 버둥거림과 눈 깜짝할 사이의 달아남. 그 사건은 너무 큰 상처가 되어서 한동안 그 길로 다니질 못했다. -24쪽

무엇보다 깜짝 놀랄 일은 갈치가 헤엄치는 방식이다. 나는 갈치가 당연히 길게 누워 헤엄치는 줄 알았다. 장어처럼 꾸물거리며. 어릴 때 그림책에서도 그렇게 본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보니 갈치가 서서 헤엄치는 것 아닌가! 서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아니 떨며 고요히 움직여 갔다. 갈치가 서 있는 모습은 정말 긴 칼이 세워진 것 같고, 그렇게 헤엄치는 갈치 떼는 무사들이 들고 있는 창검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곤도르를 구하기 위해 출정하는 로한 기마대가 떠올랐다. 그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 펠렌노르 평원에서 전투가 있기 전 기마대가 들고 있는 긴 창에 세오덴 왕이 자신의 검을 부딪치며 격려하던 모습도. -36쪽

어느 날 공터를 지나다 폐자재를 붙들고 간신히 자라고 있는 나팔꽃을 보았다. 꽃철이 지나서 시든 꽃 아랫부분엔 몇 개 씨앗이 맺혔다. 오랫동안 비워 둔 공터는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고, 나팔꽃 주변도 폐드럼통이며 못이 삐져나온 각목이며 플라스틱 파이프 등으로 어수선했다. 아, 씨앗을 떨군다면 저 씨앗은 어떻게 자랄까. 땅에 닿기도 어려울 것 같고, 땅에 떨어진다고 해도 폐자재의 척박한 그늘에서 제대로 자랄까, 걱정하다 갑자기 더빙이가 생각났다. 나팔꽃이 어디에 씨앗을 떨구어야 그나마 잘 자랄까 기웃거리는 것처럼, 이 밤에 어디에서 잘까, 기웃거리던 그 부평의 삶을 떠올렸다. 삶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늘 주변에서 기웃거리던, 그러나 순하디순한 눈동자를. 흙빛과 다름없던 매무새를. 한없이 걷고 걸어서 부풀어 오른 맨발을. -62쪽

미래를 예견하는 징조의 하나로 예지몽이란 게 있다. 엄마는 꿈이 잘 맞았다. 꿈을 꾼 뒤 누가 아픈가 보다, 죽었나 보다, 오늘 누가 올 것 같은데, 하면 얼추 맞았다. 작은오빠가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마당에서 내다보이는 식장산 위로 용이 날아오르는 꿈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외할머니가 아무리 불러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더라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엄마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대개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동전을 주우면 계속 동전이 나타나 한없이 줍게 되는, 소위 개꿈을 꾸는 내게 엄마의 꿈은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111쪽

갓 뽑은 무처럼 속까지 꽉 차 세상을 바꾸고야 말겠다고 덤비던, 순수한 오기와 열정이 넘치던 젊은 날엔 명치 끝을 날리는 매운 펀치처럼 상대를 가격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매운맛 뒤에 가려진 삶의 노곤함과 팍팍함을 그때는 채 몰랐다. 나이가 들며 삶의 매운맛은 묵직한 지혜가 되고, 달큼함은 깊은 연민으로 변해간다. 한때 꽉 찬 무 속처럼 보였던 자아가 구멍이 나서 허술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로움과 상대를 포용할 줄 아는 너그러움도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했던 목질의 틈이 벌어지고 헐거워지는 나무처럼, 팽팽했던 종잇장이 느슨해지고 바람이 드나드는 창호처럼. -125쪽

배롱나무는 흔히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린다. 꽃이 귀한 한여름, 7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가을이 시작되는 9월까지 백 일 가까이 꽃을 피우는 그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고려 말 학자 이색은 이러한 배롱나무를 보며 “사시 내내 푸른 소나무 잎이라면/ 백 일 내내 붉게 피는 선경의 꽃이로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서리와 눈을 겪으며 내 마음 더욱 고달픈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 모습 여전히 농염해라” 하며 백발의 자신과 대조되는 배롱나무의 붉음에 쓸쓸한 탄식을 보냈다. 백일홍이 지고 나면 여름은 확실히 저물고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꽃 자체는 늦게 피어 오래도록 피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붉음은 여름의 끝과 인생의 절정은 길지 않음을 알리는 듯하다. -133쪽

소리도 시각적 즐거움이 있어야 더 좋게 들린다. 장작 타는 소리를 귀로만 듣는 것보다, 불을 직접 쬐면서 빨간 불이 날름거리며 장작을 삼키고 장작이 검게 숯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특히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뒷산에서 해온 나무는 솔잎, 갈잎, 나뭇가지, 나무둥치 등 제각각이라 소리도 제각각이었다. 갈잎은 하르르 소리를 내며 빨리 타들어 가고, 솔가지는 느리게 촉촉하게 타들어 간다. 청솔가지가 탈 때는 보글보글 작은 거품까지 이는데, 매캐한 연기와 빨갛게 타들어 가는 나뭇가지의 모습, 그리고 하르르, 타닥타닥, 치직치직 하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다양해서 좋다. -151쪽

우리 화요문학도 말라르메의 화요회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화요’에는 타오르는 불처럼 무언가 격정적이고 열렬한, 순수하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있다. 아마 대학 시절에 만나서일까, 담소보다는 밤새워서 하는 토론과 논쟁 같은 청춘의 느낌이 있다. 성모다방 구석에 모여있던 알코올과 독서로 눈이 붉던 선배들. 그래서 화요문학에 들어오면 세례 수반에 든 청정한 물처럼 맑은 소주로 입교식을 하고, 나중엔 저도 모르게 평생을 시에, 문학에 복무하겠다는 저 엄숙하고도 순정한 맹세를 하게 된다. 성경 대신 아끼는 시집을 들고. 그때 그 시집이 김명인의 『東豆川』이었나, 최승자의 『이 時代의 사랑』이었나, 황동규의 『三南에 내리는 눈』이었나, 엄혹했던 시절이라 몰래 복사해서 읽던 신동엽의 『錦江』과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이었나. -172쪽

옛 물건을 들고나와 가치를 매기는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가끔 대접이나 사발 같은 그릇, 협탁 위에 두는 도자기가 나오는데, 이 도자기의 값이 병풍이나 민화, 공예품 등 다른 물건보다 월등히 높은 편이다. 도자기는 깨지기 쉬워서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기가 어려워서일까?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완전한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가치가 상당히 높을 것이다. 혹은, 우리가 고려 시대의 대표적 예술품으로 청자를 들고 조선 시대에는 백자를 드는 것처럼 도자기는 당대 미의식의 정점을 나타내는 기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박물관에서도 도자기는 시대를 가름하는 중요 미술품으로 집중 조명을 받으며 눈에 잘 띄는 곳에 전시되는 편이다. -175쪽

사천왕문을 나서니 자하루가 나타난다. 자하루는 미황사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자하루 편액의 글씨도 예술적이다. 입구 옆에는 커다란 달마상이 미황사 뒤에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석상이지만 퉁방울눈과 커다란 코, 머릿수건과 수염까지 영락없이 그림 속의 달마상이다. 원래 달마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무기 사체 썩는 냄새로 고통받는 마을 사람을 위해 잠시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 이무기에게 들어가 있을 때 지나가던 신선이 그 몸을 차지했다. 나중에 달마대사를 만난 신선이 다시 몸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달마는 이대로 됐다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원래의 몸을 받았다면 해학과 개성이 넘치는 달마상을 못 볼 뻔했으니 천만다행이랄까. -189쪽니체의 집 정문 안쪽에 큰 나무가 있다. 하늘이 너무 깨끗해서 바라보다가 나무에 걸린 커다란 별을 발견했다. 멀리 있어서 무엇으로 만든 것인진 모르지만, 얼핏 보기엔 노란 색지로 접은 것 같다. 대지와 하늘의 중간에 걸린 별.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사상은 어떤 한계에도 굴복하지 않는 초인, 위버멘쉬에 대한 긍정이다. 별은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일까, 아니면 대지에 사로잡힌 존재와 초월하는 존재의 경계에서 결국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인간 한계의 표현일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우리는 땅 위에 남아 살겠나이다.” 자크 프레베르의 기도문처럼 우리는 대지에 사로잡힌, 땅 위에 남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을 수긍한다면, 나무에 매달린 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떠올리게 한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운명애)’를. -197쪽
초원에는 야크와 말, 염소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흙의 빛과 비슷한 갈색이나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구니나 갈퀴를 들고 배설물을 모으고 있다. 모두 느릿느릿 한가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배설물은 금세 커다란 무더기를 이루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아주 많은 가축과 짐승들이 있나 보다. 초식 동물의 분변은 냄새도 심하지 않아, 거름이나 땔감으로 사용되는 순환의 고리를 이룬다. 건조하고 메마른 땅 위에 놓인 모든 부산물은 기어이 대지의 양분이 되고, 투박한 손길로 거두어지는 그 하나하나가 다시 따뜻한 불꽃으로, 혹은 다음 해 싹터 오를 생명의 씨앗으로 돌아온다. 이곳에서는 흐르는 시간마저 느리고 투명해서,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고요한 우주를 보는 듯했다. -218쪽

네팔의 신은 축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마침 티하르 축제 기간이었다. 티하르는 빛의 축제이다. 부의 여신 락슈미를 초대하기 위해 집과 거리를 온갖 촛불과 등불로 밝힌다. 빛의 축제라서 그런지 카트만두에 도착한 뒤부터 건물과 골목을 밝히는 온갖 종류의 전등을 보았다.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 때 트리나 거리를 밝히는 환한 빛이 여기에선 티하르 축제 때 이용되어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거리나 골목이 전등 빛으로 눈 부시다면 가정에선 락슈미 여신을 모신 작은 신당 주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여신을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 입구에 아름다운 만다라를 꾸며두고 신당까지 꽃과 발자국, 빛으로 장식한다. 저 빛과 꽃의 길을 따라 락슈미 여신이 집안으로 들어와 좌정하고 한해의 복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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