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언젠가 다녀온 정원을 기억하며. 십일월, 유독 따스하고 아픈 메아리가 그 계절의 끝을 자꾸 미뤄두곤 했다.
매일같이 떠나겠다 말하는 것들이 실은 가장 오래 머무른다는 사실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결국 같은 밤 아래에 살아가게 될, 청춘의 날것들.”
사랑의 잔해에서 다시 태어나는 자아의 기록.
《검은 날개와 푸른 편린》은 관계가 소멸 이후 비로소 찾아오는 감정들,
그중에서도 사랑과 자아의 경계를 섬세하게 해체해 그린 시집이다.
약간 비껴선 시선과 머무르지 않는 관찰자의 눈으로 모순적인 감정들을 담아냈다.
서지안 작가는 관계의 균열, 사랑의 잔혹함과 구원, 혐오와 애증 그리고 용서를 넘나들며 한 인간이 스스로를 재생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불완전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언어, 불가피한 냉소 속에서도 미세한 감정의 온도를 결코 놓치지 않는 문장들.
누군가를 향해 말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조금 비뚤어진 기록들이, 묘한 안도감을 자아낸다.
어둠과 빛 사이 체류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그녀의 첫 번째 작품.
그 길을 먼저 지난 이들이 스치듯 말을 건넨다.
“청춘이 가질 수 있는 우울의 색은 청아한 파랑에 가깝다.” (신하영, 추천사) “
언제라도 벗어날 수 있지만 언제까지고 머물고 싶어지는, 내 사랑스러운 지옥들.” (오휘명, 추천사)
책 속에서
청춘은 한 페이지에 그치지 않는다던 그 말이
이렇게까지 원망스러워질 줄이야
너는 어느샌가 그 장을 조각 내어
한 조각 두 조각 또 절반의 절반으로 나누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다
젊음은 순식간이라지만
생각보다 길고 가늘고 잘 늘어지며 한껏 버텨내어서
또 다른 조각을 만들어내기에
생성되는 마음들은 마치 영화 필름
한껏 넘쳐흘렀을 땐 양산형에 그치기를
처음이 그리워지면 우리를 떠올려
너 같은 애도 결혼을 하겠지만
덩굴줄기 같은 말로 남아있어
누군가 펼쳐놓고 간 성경책을 마저 읽는 기분으로
이제 다시는 넘지 못할
어린 날의 담벼락을 앞에 두고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어
종이 친다.
또 올게,
- 종달새 -
네가 극찬해 주는 것들
곧이곧대로 받들기에는
지금 너의 왜곡이 상당하고
내 속내는 미치광이 노인이 키우는 꽃밭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세 번을 말하면
이건 강조된 표현이니 희석되어 버린 마음이니?
당혹스러워 모르겠다며
손사래 치는 네가 쉬이 그려진다
태도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그저 지친 것뿐이었는데
취향 참 좋다는 말에 생각나는 건
너도 하나쯤 갖고 있을 먼지 뒤덮인 피규어
우린 서로에게 어떤 종류의 폐기물이 되려 이래
너는 내가 결과주의자라며 서운해한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속상해질 정도로 익숙하지만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는 존재도
망가뜨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혼자만의 아득한 결론을 뱉으며 서 있다
아주 근본 없는 편이라는 말로
스스로 소개하기를 좋아한다
실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떠난 것들은
며칠 후 도로 나를 반기게 되어있다
옛적에
인간이 되어 남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은
무언가 한구석 거짓 같다고 생각했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세 번을 넘게 말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헐값에 다루곤 했던 마음이지만
그때의 너한테 다 할 수 있었던 최선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알지 못해서
- 정원사 -
나름 넓은 원룸에서 쭈그려 앉아
일찍이 무언가를 손에 잡은 그들을 싸잡아 부러워한다
재벌이 많아진 세상이라던데
감사하는 것과 안주하는 것은 일맥상통한가
인사할 때는 어디까지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가 가진 이야기에 그리 날 서 있는 비극은 없는데
고유한 농도는 희석되고
사람은 늙을수록 유해진다는 게
퍽이나 다행스러워지는 감이다
난 이제 언니의 협박을 듣지 않아도 된다
언어는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읽었으면 좋겠으면서도
내가 쳐둔 울타리는 나사가 잘 풀린다
비겁하게 대충 가둬둔 양 떼가 달아난다
의미는 꾸물꾸물 기어오른다
당신도 텅 빈 눈동자로 텅 빈 골목을 걸어봤다면
대로변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나를 얼핏 보긴 했을 터이다
반면
새벽에 나돌아다니는 짓 자체를
좀처럼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영영 이 구역에 발 들이지 않기를 빌어본다
가끔 궁금해진다
열아홉의 자아는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육 차선이 넘는 도로를 무단으로 가로지른
그 충동은 어디에서 온 건지
이젠 대답할 수 있겠니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게 가장 날 괴롭게 한다는 걸 아는지
돌아본 과거 이력 중에
가장 부유하게도 받아 처먹은 게 많은 시절이다
뻔뻔했고 자기중심적이었고
그러나 괴로움은 괴로움일 뿐
그 이상으로 승화시킬 능력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울분을 토해낸다
아직도 세상의 중심은 나다
사람인지라 시야가 좁나보다
도마뱀같이 살고 싶다
민첩하고 조용하고 예리하고
오른쪽과 왼쪽을 동시에 다 볼 수 있는
- 도마뱀의 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