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는 ‘결핍’과 ‘그리움’을 먹고 탄생하는 아름다운 생명체이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 또는 욕망을 의미하며, 그리움 역시 대상에 닿지 못하는 결핍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마음 작용을 형상화한 것이 곧 시이다. 이상수 시인이 건너온 가난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그리움의 정서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지만, 그중에서도 「가훈」은 가난을 온몸으로 밀고 가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형상화된 수작이다. 산문시 형식을 지닌 이 작품은 내용적인 측면이나 형상화 기법에서 ‘시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삶을 건너는 방법으로 시 쓰기를 택한 사람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시는 구원이자 치유이며 숨통”이라고 말했듯, 시인은 시를 쓰며 애환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걸음을 내딛기로 맘먹은 사람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필이 뭉뚝해질 때까지 씨름한 흔적이 시의 행간마다 핏빛 지문으로 남아 있다.
_안현심(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길이 끝난 길에서 시를 만났다
시는 팔짱을 껴오며
늦은 밤의 넋두리에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스쳐 간 시간과 머물다 온 인연을
얼굴 씻겨 데려다주었다
에둘러 지은 매듭,
그립고 고마운 이들에게
기별처럼 내놓을 수 있어서 기쁘다
겨울이 오래도록 따뜻할 것 같다
2025년 가을
이상수
책 속에서
선물을 받는다는 건
한 사람의 오랫동안을 받는 일이다
-「선물」 부분
요즘은 안아 올릴 때마다 핀다
하얀 목젖 보이며
까르르 까르르 소리까지 낸다
-「제비꽃」 부분
어금니 한 번 깨물면 되는데
심호흡 한 번이어도 되는데
끝내 내놓지 못하는
저 가엾은
-「살짝 」 부분
그늘은 넓어지고
푸르름은 하늘을 덮었을 텐데
나는 돌아갈 수가 없다
모든 그리움은
철없이
마음속에서만 핀다
-「둥구나무」 부분
아픈 기억은 수명이 없다
분위기만 맞으면 언제든지 깨어나
죽비처럼 몸을 때린다
-「형상기억합금」 부분
그리운 사람의 안부를
남에게 들을 때만큼
쓸쓸할 때는 없다
-「안부」 부분
강이 강으로 들고
강이 강을 맞이하는
물안개가 비밀처럼 드리운 이곳이면 좋겠다
-「양수리에서」 부분
이렇게 세상이 풀리는 날엔
눈송이처럼 펄펄 날리고 싶다
몸과 마음 아무 데나 던져놓고
나이마저 확 넘어뜨리고 싶다
-「이런 날엔」 부분
몸에 몸을 맞댄 채
상륙작전에 나선 병사처럼
길 건너를 노려보고 있다
-「진군進軍」 부분
낯선 예감의 끝,
화염처럼 올라오는 열기에
툭 툭, 몸을 연다
-「수국」 부분
눈을 내리깔고
왜 왔느냐고 따질 것 같은 그 앞,
가만히 돌아앉아 잡초만 뽑고 왔다
-「노각 -주말농장 3」 부분
휴지 조각처럼 버려지는 인연들 앞에
한번 정표는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걸
탑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리라
-「돌탑」 부분
낙숫물이 물방울을 지어내고 다시 지우듯,
너를 내놓았다가 거둬들인다
어느 날 아득히 먼 너를 만날지 모르지만
그건, 내 안의 너를 송두리째 지우는 일이다
-「지독한 당부」 부분
끈적이지 않는 물기를 머금고
고요히 머물다가 자리 뜨는
너를 생각해 보는 거야
-「포스트잇」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