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어≫는 시와 그림이 한 자리에 머물며 서로의 호흡을 배워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동 창작의 기록이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며 언어의 가장 순수한 지점을 바라보던 저자가, 이번에는 시인들과 화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열어젖힌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작고 따뜻한 작업실에 모인 여섯 명의 창작자들은 ‘귤’, ‘시간’, ‘집’처럼 소박한 단어 하나를 두고 각자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누군가는 시로, 누군가는 선과 색으로 응답하며 만들어낸 이 장면들은 때로는 명확한 해답보다 서로의 감각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더 깊이 이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흔들리고 반짝이는 순간들을 한 권의 리듬으로 묶어낸 결과물이다.
2년의 과정 동안 사람은 오고 갔고, 그 변화는 시의 주어를 바꾸고 그림의 결을 흔들며 책에 또 하나의 숨을 불어넣었다. 병현 시인의 긴 공백, 떠나간 이들, 그리고 새로 합류한 은진의 시선까지-이 모든 이동은 결국 한 권의 시집이 품게 된 ‘시간의 표정’이 되었다.
이 책은 시집이면서 동시에 창작 공동체의 기록이며, 잊히지 않기를 바랐던 순간들의 아카이브다. 시를 처음 쓰는 사람에게는 시작의 용기를, 오래 써온 이에게는 언어의 첫 기원을 다시 불러오는 질문을 건넨다.
“그래서, 당신에게 시는 무엇인가요?”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어≫는 이 질문을 독자의 손에 조용히 쥐여주며 시작된다.
책 속에서
<천사 선언문 8>
첫째, 우리 안에는 각자의 천사가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천사를 꺼
내주세요.
둘째, 시와 그림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시와 그림을 동의어로 생각
해주세요.
셋째, 당신만의 천사를 함께 그려내주세요.
천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아무도 답을 말할 수 없어요
그건 꽤나 근사한 일이에요 시가 무엇인지 그림이 무엇인지 물어
도 아무도 답을 모르는 것처럼요
눈앞에 없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다 보면
어느새 천사가 앞에 있어요
내 안으로
투명하게
엇갈리며
내 바깥으로
빛의 모양처럼
새어 나가며
“난 너를 만나기 위해서 밤마다 열 번도 넘게 눈물을 흘렸어”
“난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백 번도 넘게 시를 썼어”
우리의 만남은 아주 오랜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요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어 79>
희고 커다란 종이
불안이라는 연필로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
연필 끝은 자꾸 흔들렸고
작은 천사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지
“사실 천사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아”
큰 목소리는 종이 위를 덮어버렸고
모두들 잊어버렸어
내가 무엇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케케묵은 종이를 꺼낸 건 어른이 된 지금
이제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 종이를
까만색 아크릴 물감으로
가장 큰 붓으로
물감이 마를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자리도 남겨두지 않고
지우개 자국뿐인 종이 위를
가득
검정의 물감으로
불안으로80 81
이제는
물감이 말라 끝부분이 동그랗게 말린
종이 위를 바라보고 있어
작은 붓 하나를 들어
팔레트 위에 있는 흰 물감 한 조각
붓 끝으로 톡 찍어
종이 위로
검정 위로
작은 점으로
하양으로
빛으로
다시,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