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별빛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
-고미화 수필집 『별빛을 담다』에 붙여
이방주 수필가, 문학평론가
마름하기
고미화 수필가가 첫 수필집 『별빛을 담다』를 상재한다고 한다. 원고를 받아보니 더 반갑다. 그는 수필 〈하늘빛을 담으려면〉 〈후박나무 꽃향기〉가 2018년 월간 《한국수필》 8월호(통권 202호)에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게재되면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그의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 그간 《한국수필》 《수필과비평》 《수필미학》 《수필세계》 같은 국내 유명 수필 전문지에 작품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우리 고장 일간지 《충북일보》에 짧은 수필을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수필집 『별빛을 담다』 원고를 천천히 읽었다. 작품집을 펴내지 않았을 뿐이지 등단 이후 멈추어 있는 작가는 아니었다. 꾸준히 붓끝을 다듬고 글 밭을 갈아 김을 매면서 벼리고 담금질해 왔기에 기대가 더 컸다. 권두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수필을 향한 수련의 과정에서 수필에 대한 관점이 정립된 모습이 보였다. 그의 수필관을 이렇게 정리한다.
-일상에서 잃어버린 체험을 반추하여 제재로 삼는다.
-삶의 세계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위안의 끈을 되살려 주제로 삼는다.
-독자에게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기회를 주면서 공명을 얻는다.
-살아가면서 마음의 창에 걸어 놓을 수 있는 별빛을 소망한다.
짤막한 그의 소회에는 수필가로서의 살아온 과거와 그리고 갈고 다듬는 현재와 문학으로써 독자들에게 다가갈 미래의 소망이 담겨 있다.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고백이다. 일상에서 겪은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 독자와 함께 나누는 문학이 수필이라는 생각이다.
등단 이후 지면에 발표했거나 발표하지 않은 작품 전 54편을 6부로 나누어 ‘삶의 향기 쉼표 하나-별사람-이웃-희망’이라는 주제로 가름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수필 창작을 공부한 문우로서 54편을 하나로 꿰는 언어로 말하고 싶다. 그래서 찾아낸 단 한 마디가 ‘별빛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이다. 그의 글에서는 자아가 소망하는 별빛에 대한 정의가 보이고, 별빛에 대한 그리움이 보이고, 별빛을 향하는 여정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관계를 지어가는 사유가 존재한다. 당연히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죽음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을 경건하게 받아들이고 거룩함으로 승화할 수 있는 사유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작품에 나타난 그의 인식 세계이다.
수필은 삶의 세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작가가 지니고 있는 인식의 세계를 알아보지 않고 수필을 읽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인식의 세계를 알아보지 않고 작품을 덮어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을 읽은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작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았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작업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형상의 방법을 알아보는 것이다. 일상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얻은 삶의 철학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어떤 언어, 구성, 문체를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 수필문학은 2000년대 들어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2020년대 이르러 체험을 소환하여 해석하고 상상하는 구성으로 수필문학의 독자성을 유지해 오던 전통 수필에 철학성과 서정적 민족 정서를 수용하여 미적 감동을 불러오는 변환과 성장을 가져왔다. 더구나 최근에는 철학적이고 교시적인 아포리즘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소소한 일상의 서사에 담아내어 독자층의 호응을 크게 얻어내고 있다. 고미화는 이 시기에 수필가로 등단하고 등단 이후에도 계속하여 수필 창작 수련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필관을 바탕으로 인식의 세계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비교적 감성적이고 서정성을 드러내는 그의 개성적인 문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작가와 독자 사이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미화의 사유 단계는 전통에서 많이 벗어난 듯하면서도 전통적 구성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 구성법도 아울러 알아보고 급변하는 2020년대 한국수필 문단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별빛, 영혼이 승화하는 초월적 매체
고미화가 소망하는 별은 무엇일까. 그에게 별은 그리움이고 아쉬움이다. 별은 푸른 사연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찬란한 푸르름으로 영원성을 획득했다고 했다. 별빛은 가슴 시린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에게 별은 꿈이고 희망이다.
우리 문학에서 별빛은 그리움과 추억, 어둠 속의 희망, 순수한 영혼, 영원한 진리를 상징한다. ‘빛바랜 동심이 올라와 세월의 무게를 덜어낸다.’라고 했듯이 멀리서 아련히 빛나는 별빛은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을 상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잃은 사랑, 떠난 사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기도 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을 토대로 한다. 삶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혹여 지금 어두운 시공간을 지나가는 중이라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보자. 짙푸른 창공에서 조용히 보내는 별빛의 응원을 놓치지 말자.
밤이 더 깊어지고 있다. 푸른 별빛이 한 아름 담긴 하산 길이 충만하다. 영월 여정 마지막을 천문대로 정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튿날 남한강 줄기를 거슬러 오는 귀갓길이 은빛으로 환하다. 신화가 되기를 거부한 낮별들이 강물 위에 내려와 유희를 즐기고 있다. 초가을 맑은 햇살에 은방울 같은 별꽃들이 눈부시게 고운 몸짓으로 우리를 배웅한다.
「별마로 천문대」에서
이 작품에서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별빛을 보고 있으면서 그것은 절망 속에서도 어둠과 공존하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상과 꿈과 동경이 이 별빛에 담겨 있다. 더구나 낮에 보는 강물의 반짝임까지도 별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별마로 천문대」를 비롯한 여러 편의 작품에 드러난 고미화의 별빛은 때로는 인공의 불빛에서 밀려나기도 하지만 내면의 순수함, 고귀한 양심, 정신적 가치를 지니는 영혼의 빛으로 반짝인다. 이러한 별빛은 아스라하게 멀리 보이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서 초월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신성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미화는 꿈을 이루기 위한 방향성에 관심을 갖는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인간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배가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바닥짐을 들어 설명했다. 작가는 그의 작품 「바닥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정신적 고통이든 육체적 고통이든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갖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바닥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별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에도 적당한 바닥짐은 필요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파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발맞추어 살아가다 보면,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상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의 바닥짐이 부족한 나는 간혹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딪혀 흔들리게 되면, 강풍을 만난 배처럼 요동치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곤 한다. 내면의 바닥짐이 가벼운 탓이다.
「바닥짐」에서
그는 수행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견고한 ‘마음의 바닥짐’을 갖기 위해서, 설익은 말도 담아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고의 사각지대를 인정하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현실이 행복하고 우아하다 하더라도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바닥짐이라는 중력이 없으면 허공에서 흔들거리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별빛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정신적 수행을 계속한다. 수행 과정에서 고통을 나무의 우듬지에서 발견한다. 「어떤 아름다움」에서 ‘인고의 시간이 응결된’ 우듬지의 굵은 옹이에서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의지를 불태운 나무에 경외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통과 시련이 승화된 아름다움에 향기가 배어있음을 확인한다.
별빛을 향하는 사유의 여정에서 고통이든 아름다움이든 현실을 수용하여 순화하면서 자아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견지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 별빛은 영혼의 승화와 소망의 빛으로 가는 초월적인 매체가 되었다.
사랑, 소리 없이 번지는 향기
고미화는 사랑을 ‘소리 없이 번지는 향기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소리 없는 사랑은 소리 없이 스며들어 누군가의 가슴을 충만하게 한다며 그 속성을 밝힌다. (「후박나무 꽃향기」에서) 국어사전에서는 사랑을 ‘사람이나 존재를 아끼기 위하여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이라고 한 풀이에 비해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자기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마음의 움직임’, 즉 타자를 향한 긍정적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플라톤은 사랑(eros)를 ‘결핍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에의 동경’이라면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아름다움, 즉 진리로 나아가려는 상승 작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의 선함을 인정하고 함께 나누는 윤리적 관계’라고 설명했다.
『별빛을 담다』에 수록된 사랑을 제재나 주제로 한 몇 편의 작품에서 고미화는 사랑에 대하여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는 자세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고통을 함께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실천적 행동으로 보았다. 자신이 실천하는 사랑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작품에 대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 시부모, 남편, 아들, 딸, 손자, 동생, 시매부 등의 가족―의 가슴에 소리 없이 스며드는 향기라고 규정하고 실천한다.
사랑의 실천을 제재로 한 작품 「공산성에서」는 어머니와 사위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성찰한다. 「재래시장에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재래시장에 가는 서사를 통하여 불효를 반성한다. 그밖에도 손자, 아들, 딸, 동생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가족들에 대한 실천하는 사랑을 제재로 한 작품이 유독 많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치유를 받는 작품도 있어 눈길을 끈다.
소금은 겸손한 성질을 지녔다. 유기물 속에 겸허히 스며들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욕심 없이 자취를 감추고도 오롯하게 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일치할 수 있지만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맞닿은 존재가 고유성을 잃지 않도록 이타심을 발휘한다. 그렇게 변형 속에서도 본연本然을 간직할 수 있다고 다독인다.
올해 고희를 맞이하신 그분의 삶을 돌이켜 보니 지나온 발자취에 소금 향기가 가득하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걸어온 이타적인 발걸음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소금 향기」에서
작가는 남편의 매형(시매부)이라는 분의 이타적 사랑을 가정에 ‘빛과 소금’으로 자리했다고 규정한다. 그분의 사랑으로 ‘삶의 뜨락에 볕이 든다’, ‘영혼의 상처가 말끔해지곤’ 한다며 마음의 치유에 감사한다. 이 작품은 ‘소금’이라는 소재의 본질을 궁구하여 사랑의 본질을 찾아내는 통섭의 방법으로 전개해서 사랑의 속성을 더욱 명징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진술 방법은 형상을 이야기할 때 더욱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작품 「소금 향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속성은 매우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결국 사랑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존재를 향하여 별빛을 올려 비추는 정성, 고난과 고통이라는 어둠 속에서도 올려놓은 별빛을 향하여 찾아가는 마음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가슴을 지닌 그에게는 믿음이 있다. 자신이 향하는 별빛의 여정에는 언젠가 자신을 향하여 비추는 별빛이 있을 것이라는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리움, 영적 탐색의 무늬
고미화는 노을을 그리움의 시간이라고 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앞에서 친구의 말을 빌려 ‘그리움은 원치 않는 잃음의 반영’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반영이란 말은 ‘반사되어 되비치는 그림자’인 반영(反影)을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원치 않는 잃음은 누구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누구나 그리움을 안고 살 것이다. 어찌 보면 한국문학의 전반을 하나로 꿰는 정서는 그리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고미화가 말하는 ‘원치 않는 잃음’이란 단순한 정서나 감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결핍과 회귀에 대한 가욕(可欲) 즉 선(善)으로 인식되어 문학의 중심 제재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그리움이 솟아오르는 근원적인 샘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정이 많은 민족인데도 상실과 부재가 따라다녀서 한으로 엉겨 정한(情恨)의 문학이라고 할 만큼 그리움은 우리 문학의 중요한 제재가 되었다.
한국문학에서 그리움은 ‘사랑의 부재’, ‘고향 상실’, ‘국권의 상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회한’ 등으로 구체화되어 그리움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유가 시작된다. 서민의 정서가 진솔하게 담긴 고려속요에는 이별과 기다림의 정서가 배어있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리움으로부터 시작하는 정과 한의 문학이었다. 국권을 상실했던 20세기에 들어 한국문학은 상실된 고향의 정체성과 그 회복에 대한 절절한 가욕(可欲)을 담아 문학이 저항의 에너지가 된다.
고미화의 작품은 한국인의 일반적인 그리움에서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리움 제재는 단순하게 과거 기억을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의 절제, 그리고 떠난 존재와의 영적 연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존재의 성찰로서의 회귀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성찰은 다른 사람의 세계, 그리고 절대자의 신성성에 다가가려는 존재적 감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고미화의 수필 가운데 그리움을 담은 몇 편을 살펴보면, 그리움이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특히 군에 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말하였다.
내 그리움의 무늬는 다채롭다. 새벽녘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하시던 할머니의 모습도,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아릿하게 기억된다.
석양이 빚어내는 노을은 우리의 모습 같다. 닮은 얼굴, 비슷한 표정은 있을지언정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맑은 날의 강렬하고 붉은 노을도 좋지만, 잔불이 남아 있는 아궁이 속처럼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2월의 유순한 노을빛도 좋다.
가까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리움은 원치 않은 잃음의 반영이다. 그리움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승화된 사랑이 열매로 남은 것이다.’ 그의 사유와 언어가 내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지금 곁에 없는, 닿을 수 없는 그 대상에 대한 간절함이 그리움이란 싹을 틔운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라서 그리움을 담고 사는 이의 마음은 유순할 수밖에 없다.
「노을 앞에서」에서
작가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 앞에서 그리움의 시작은 가족이라고 고백한다. 할머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움의 원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서 시작하는 그리움은 다시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움을 담고 사는 사람은 유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그의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의 무늬’로 성숙한다.
노스탤지어의 속성은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니까. 사랑과 그리움이 비례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인 듯하다. 추억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무늬가 소중한 그리움으로 간직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설레었던 시간도 여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서쪽을 향해 달리는 이 시간, 나는 지금 미래의 그리움 속으로 가고 있다.
「노을 앞에서」에서
이렇게 그리움은 미래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절대자에게 향한다. ‘석양이 빚어내는 노을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그리움은 하늘을 닮는다. 우리가 하늘을 그리워하듯이 하늘도 우리를 그리워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어느 수녀님의 수필과도 같다. 다시 말하면 그리움은 군에 간 아들 뿐 아니라 곁을 떠난 친구나 연인과도 대화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절대자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와 대화도 가능한 영적 통로가 된다.
고미화는 다른 작품에서 절대자를 만날 때도 그리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젊은 날의 그리움의 빛깔은 노란색이었다가 지금은 갈색이 되었다면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이동에 대하여 말한다.(「디어 마이 프렌즈 고독」에서) 그래서 절대자를 만날 때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미화의 그리움은 단순한 결핍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사유의 정서였다. 그의 그리움은 상실과 회복의 바람(可欲)에 대한 의지였으며 자아 성찰과 영적 탐색으로 승화되어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리움은 한국문학의 정한(情恨)이라는 정서적 유전자이자 존재의 본질적 고독이 내재한 감정으로 고미화 수필가에게도 깊은 반영을 끼쳤다고 본다.
죽음, 거룩한 완성
‘죽음은 삶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는 순간’이라는 것이 고미화의 생각이다. 죽음은 삶의 거룩한 완성이란 말이다. 한국문학 작품이나 전래 설화에 담긴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의식은 자연의 순환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은 생의 원향(原鄕)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인에게는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생각이나,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세계라고 보는 공통된 의식이 있다.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떠나는 것일 뿐이라는 영육분리 의식도 있다. 심청전처럼 죽음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완성으로 보는 작품도 있다. 이에 비하여 서구의 기독교 사상은 ‘죽음이란 부활의 문’이라 생각하면서 하나의 통과의례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죽음은 삶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민족과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죽음이라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삶을 더 깊게 이해하려 하는 초월적인 인식이다. 다음 작품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윤리적 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 죽음의 문턱이 아닐까 싶다. 지상과 영원히 작별하는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원초적 본능이 내 행위를 지배할지도 모르겠다. 그 행위는 삶의 여정 중에 쌓인 가치관에 의해 표출되기도 하리라.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 내 삶의 마지막 장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해 본다.
「고결한 순간들」에서
죽음 앞에서 고결해지는 것이 거룩한 일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미래를 단정할 수 없으니 진정 그런 모습일지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그런 모습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삶의 희망이 사라진 절망적인 순간에도 초연할 수 있는 모습에 작가는 감동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윤리적 완성을 보여주는 죽음은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 「여름이 되기로 했다」에서는 죽음에 앞서 대세(代洗)를 받으시는 시부모의 감동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거룩한 죽음의 모습은 멀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부모님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유교적 가치관은 죽음을 윤리적 완성으로 생각했는데 천주교의 대세 의식에도 공통된 사상이 존재하는 것을 이 글에서 볼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확인한다. 고미화 수필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삶에서 ‘짧지만 찬연한 생’을 발견한다. 고흐가 아우인 테오에게 쓴 서간문을 읽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 고독했지만 외롭지 않은 삶, 자신에게 정직한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흔들렸던 자신을 바로 세울 수가 있었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의 하루」에서) 어찌 보면 이러한 삶의 과정은 삶의 완성인 거룩한 죽음을 향한 실행이다.
죽음에 대한 작가의 의식은 자신도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개체임을 깨닫게 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빗방울이 떨어져 하천을 지나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고, 순환하는 여정에서 시작과 끝을 어떻게 규정하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닐까.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경구는 생태주의 사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ecologism)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생명은 상호 의존적이며 순환 속에서 존속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 속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생태주의 사고와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의식은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자연을 이루는 개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모든 개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고이다. 자연은 개발하여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언젠가 돌아가야 할 원향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내 발밑이 바로 ‘바다의 시작’이라는 말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향이 바로 여기라는 의미이다.
고미화의 작품 세계에서 죽음은 거룩한 완성으로 해석된다. 슬픔을 초월하여 정한(情恨)의 승화라는 의미이다. 죽음은 윤리적 선택, 정한의 정서와 결합하여 슬픔을 초월한 미적 감동으로 승화된 것으로 해석하여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그의 작품은 찬찬히 의미를 새기며 읽으면,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거룩한 완성이라는 기독교 사상과 공통되는 한국인의 공동 심의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세계를 찾아내어 용해하는 것이 수필 문학에서 거둘 수 있는 효과이다.
별빛으로 형상화하는 언어
작가의 개성은 형상화 기법으로 드러난다. 아무리 깊이 있는 철학적 인식과 해석일지라도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수필은 비전문적인 문학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나 대충 써놓고 수필이라고 한다면 문인의 자세가 아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말을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써도 된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에 적절한 형식이 있고,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구성도 필요하다. 수필은 사유의 단계가 있고 상상의 방향이 있다. 이러한 수필 창작의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잡문일 수밖에 없다.
한국 전통 수필은 한국인 나름의 사유 체계에 맞추어 구성해야 한다. 생산자든 수용자든 우리식의 사유가 있기에 체계에 맞추어 쓰면 그만큼 공명이 빠르다. 사유의 체계는 시대와 계층에 따라 변환하지만 기본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고미화의 『별빛을 담다』에 수록된 작품을 살펴보면 작품마다 구성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일상의 체험에 대하여 작가 자신의 소양과 교양에 따른 해석과 그 해석에 따른 상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성은 고려 시대에 이미 완성된 한국 전통 수필의 구성 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등단작인 「하늘빛을 담으려면」을 예로 들어보면 구성 체계가 뚜렷이 보인다. 먼저 물이 흐린 호수와 맑은 호수를 본 경험을 소환한다. 그 호수에 하늘이 담긴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빗대어 자아를 성찰한다. 「소금 향기」도 같은 구성이다. 이런 구성 체계의 큰 틀은 수록된 54편의 작품에 대부분 통용된다.
그의 작품 구성상 특징은 또 있다. 대부분 작품이 일상의 체험을 소환한 서사를 뼈대로 한다. 거기에 서정으로 살을 붙여 감동을 준다. 그러나 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다. 그의 수필은 어디까지나 서사가 중심이다. 서사에 담긴 그의 인식이 더 큰 감동을 준다는 말이다.
소환된 체험으로 된 대부분의 서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재미를 주지만 이야기가 아니라 서사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자아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서사는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한 자료일 뿐이다. 이 경우 체험 서사를 상관물이라고 한다. 체험 서사의 상관성을 통한 인식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구성법이다.
고미화의 작품은 매우 서정적이고 시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는 자아의 정서를 솔직하게 고백하였기 때문이고, 적절하고 고급스러운 보조관념으로 상징과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의미 없이 허랑하지 않다. 이것은 수필 문장이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쓴 단단한 표현법이다. 수필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좋지만 주제가 흩어지면 효과는 반감된다. 표현보다는 메시지가 우선이라는 문장 표현법을 잘 알고 쓴 수필이다.
수필 창작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진술 방법의 선택이다. 대개의 경우 서사나 묘사의 방법으로 진술하는 것이 독자에게 현장감을 준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필가는 설명으로 일관한다. ‘말하기’ 방법을 쓴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미화 수필가는 ‘보여주기’ 진술이 대부분이다. 묘사나 서사가 많다. 물론 여기에 설명을 가미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의 수필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읽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고미화의 형상화 방법은 이미 수필의 문학적 별빛을 찾아가고 있다. 더 많은 내용을 누누이 설명하지 않아도 읽는 동안 독자의 눈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도 쓰지 않으면 굳어버리거나 끝이 부서지듯이 끊임없는 수련이 더 품격 높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휘갑치기
고미화 수필가는 2018년에 등단하여 작품을 서울과 지방의 문예지에 발표하였다. 또 등단하기 이전에 수년간 수필 창작 공부를 해왔다. 그는 우리 수필 교실에 와서 별난 창작법을 얻은 것 같지는 않지만, 좋은 작품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고, 전국 문단에서 좋은 글을 쓰는 수필가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별다른 말이 없다. 자신을 남 앞에 세우지도 않고 남을 자신 앞에 세우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떤 철학에 갇히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철학이 쉽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애쓰지도 않고 누군가를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높지 않다. 강하지도 많지도 않지만 그의 말은 설득력 있고 울림이 크다.
고미화의 삶이 곧 수필이다. 『별빛을 담다』에 수록된 54편의 작품이 곧 그의 삶이다. 작품이 곧 수행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과묵하고 잔잔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도 고난이 있고 정신적 고통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별빛을 담으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으며, 세계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였으며, 사랑하는 별빛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았으며, 신앙심을 잃지 않았고, 삶의 완성을 위하여 오늘도 별빛을 찾아가는 사유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