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섬이 아닌 섬// 아무나 올 수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코앞에 있어/ 눈 밖에 있는// 너무 가까워서 먼 섬// 물에서 뭍으로 밀려나/ 뭍에서 뭍으로 떠도는// 따개비도/ 돌미역도 하나 없는// 자그맣고 까칠한 섬//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둥둥 떠다니는/ 텅텅 비어 있는// 까무잡잡한 외톨 섬
-김영삼, 「아무도我無島」 전문
캄캄하고 적막한 곳에서 살다/ 일 년에 열흘쯤 나들이를 한다// 당신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유일한 행복/ 당신의 몸에 기대 어쩌다 누리는 햇살과 바람// 그 나머지는 우두커니 서 있거나 접힌 채/ 꼼짝없이 숨죽이며 살아간다/ 감옥 같은 세상// 오늘이 내일로 이어질 때/ 내 몸은 서서히 닳아간다// 사방이 가로막힌 채/ 켜켜이 줄지은 제 자리에서/ 답답한 공기, 고요한 어둠을 참아낸다// 당신이 나를 단 하루라도 사랑하여/ 잠깐이라도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다면/ 나의 인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김은미, 「단 하루라도」 전문
아이의 눈물 같은
툭 던져진
그리움
돌아서는 계절의 뒷모습
-김훈기, 「낙엽 2」 전문
마당 한구석/ 시간의 풍화와 침식을 기다리는 곳// 할머니도/ 어머니도/ 한 번씩은 초승달 뜬 저녁/ 엉덩이를 들고 볼일을 보게 하던 곳// 소똥이 잠을 자면/ 말똥구리가 집을 짓고/ 아들 똥이 잠들면/ 샛별이 내려와 덮어주던 곳// 혼곤히 썩고 또 썩고// 거름의 존재감이/ 온 마당을 촘촘히 점령하면/ 차곡차곡 높이높이 쌓여있던/ 살아생전 삭지 못할 응어리를/ 모두 안아 내린다
-배인주, 「거름의 독학」 전문
넘쳐흐르던 강물이/ 뱃속을 드러내고 실개천으로 흐를 때가 있다//
머리카락을 흔들며 살랑대던 바람이/ 큰 나무를 넘어뜨리는 때가 있다//
따듯하게 손을 녹여주던 난로가/ 큰불이 되어 집을 삼킬 때가 있다//
그의 보드라운 입술에서 나온 말이/ 온 가슴을 시커멓게 태운 때가 있다
-이순남, 「살다 보니」 전문
도심의 빌딩 숲 사이,/ 낡은 집들이 섬처럼 떠 있다// 지붕에 덧댄 천막과 비닐/ 눌러 놓은 타이어와 기왓장이 / 마지막 몸짓처럼 보인다// 내릴 곳 없어/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민 같은 살림// 아직 식지 않은 온기가/ 반갑다// 음식물쓰레기 수거함에서/ 풍기는 냄새가 살고 있는/ 비좁은 골목// 문 앞에 바싹 당겨놓은 화분/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임인숙, 「회색 섬(Grey Island)」 전문
알람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자연스레 눈 떠지는 아침/ 자기 전 챙겨 놓은 책을 두 쪽 읽고/ 반야심경 한자로 필사를 한다.// 요가 매트를 찾아서 정갈하게 펼친다./ 오늘의 요가 스승은 에일리 아니고 에일린/ 내일의 요가 스승은 가든 아닌 테라스/ 때로는 소년을 만나기도 한다.// 꿈은 계속 꾸기만 하면 물거품/ 연필을 챙기고 도화지를 챙겨서/ 호숫가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손짓하며 도화지 속으로 풍덩
-지은영, 「내가 되고 싶은 하루」 전문
더 이상 세속의 밥을 받아먹지 못하고 거친 돌팍 밑에 자리 잡고 뿌리내리는 팽나무 밑에 내가 몸 바꿔 누우면 어둔 밤 아무리 여러 마리가 울어도 땅 밑의 그놈들도 모두 홑 밤인 그것들을 데불고 내 혼은 달팽이처럼 일어나 치맛자락에 감치는 몰 현금 소리에 제 흥에 겨워 살아서처럼 육천 마디 노글노글해지도록 뼈다귀 없이 춤을 추다가 밤새도록 춤을
-한경림, 「홑 밤」 전문
정신 줄 하나는/ 문어 삶는 솥뚜껑 위에 올려놓고/ 세계를 꿈꾼다/ 알 수 없는 한 세계에 꽃신을 신겨 놓고/ 또 다른 세계의 머리에 화관을 씌운다/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문어 솥은 끓어오르고/ 노을에 섞인 갈매기 울음은/ 바다로 나가고/ 울음을 따라나서는 텅 빈 정신 하나가/ 바다에 서 있다
-황영순, 「주문진 어느 하루」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