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이렇게 지내다가 2학년이 되자 뭐라도 해야지 생각이 들면서 고등 고시에 응시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당시에 법정대학에서 법학과는 사법고시, 행정학과는 행정고시, 정외과는 외무고시를 치는 것이 정석처럼 되어 있어서 외무고시 응시에 방향을 잡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마침 그즈음에 인천제일교회 청년회장인 김성수 선배가 우리 교회로 찾아와서 대구에서 열리는 우리 교단(예장통합) 청년회 전국연합회 수련회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엔 아버지와 몇 분 장로님이 같이 개척한 대광교회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 멀리 놀러 갔다 와서 마음잡고 고시 공부하자는 심산으로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리는 장청 전국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우연히 간 이 모임이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해주는 모임이 되리라고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
아무튼 그 여파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이후 기독교사회운동과 민중운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대학 3학년 때인 1978년 성대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동대문서에 연행되어 2달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학교에서는 무기정학을 당하여 군에 입대했다.
1부?김영철 _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대학 시절〉 중에서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시기에 인천EYC 회장을 맡게 된 것이다. 사실 그때는 내 3년 후배가 전임 회장이었는데 전국EYC 임원으로 가게 되면서 나에게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난 이미 전도사로 활동하는 목회자인데 어떻게 청년 운동을 하겠냐고 말했지만 결국 목회한다는 마음으로 회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987년은 직선제 개헌과 호헌 철폐의 구호 아래 민주화 대항쟁이 진행된 해이다. 내가 회장이 되면서 맨 먼저 한 일은 사무실을 옮기는 일이었다. … 그래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비교적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간석동의 목욕탕 2층을 빌렸다. 그런데 들어갈 전세금 300만 원이 문제였는데 현직 초등교사로 근무하던 황중숙 부회장이 모아두었던 시집갈 자금을 기증해 주었다. … 당시에 300만 원이 적은 돈이 아니었는데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재작년에 정년으로 교직을 퇴직한 황중숙 선생과는 지금도 부평마을대학 협동조합을 만들어 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때 꽤 많은 교회 청년들이 그 사무실에 드나들었는데 그중에 지금도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분들이 많다.
1부?김영철 _ 〈1977년~1987년 기독학생, 청년 운동에의 참여〉 중에서
1997년은 한국을 비롯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국제적인 금융위기를 맞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일어났다. 한국 경제위기는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관리 체제를 초래했고, 이런 과정에서 회사들이 줄도산하고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나고, 인천에서도 생활보호대상자가 두 배로 증가하는 상태가 일어났다. 우리 교회에서는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를 위한 ‘어깨동무공부방’을 시작하고 실업 대책 프로그램을 노동상담소를 통해 전개했다. 지역연대 차원에서는 ‘인천지역실업극복운동본부’를 만드는 일에 양재덕 의장님과 함께 참여하여 고백교회에 ‘서인천지역실업극복운동본부’를 유치했다. 지금은 서구지역자활센터가 되었는데 실직가정돕기, 실업자종업지원센터, 결식아동지원사업 등을 진행했다. 실직여성 겨울나기, 자녀교육지도, 무료진료사업, 자활공동체 지원 등의 사업도 시작했다.
1부?김영철 _ 〈1988년~1999년 민중교회 운동에의 참여〉 중에서
80년대 민중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내게 민중교회 활동가에 대한 제안이 들어와 인천 서구에 있는 고백교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 89년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김영철 목사님과 함께 기타반을 만들었다. 간단하게 포스터를 만들고, 전봇대나 상점 기둥에 붙이며 다녔다. 예상외로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교회로 모였다. 대강 15명 정도로 기억한다. 그 친구들을 근간으로 교회 청년회를 만들었다. 당시에 다른 민중교회와 마찬가지로 집회도 나가고 학습도 진행했다. 그 청년회에 Y악기를 다니는 노동자들이 몇 명 있었다. 청년회에서 몇몇 친구들이 활동을 준비했지만 대부분 기억은 나지 않는다. Y악기가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석중이와 승미가 나중에 결혼을 하고 둘이 Y악기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도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고백교회를 나올 무렵 나는 결혼을 했다.
2부?이승용 _ 〈고백교회〉 중에서
무엇보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동네 자원봉사에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주신 아주머니들이다. 나중에 친해지고 안 사실이지만, 이분들은 평화의원을 빨갱이 병원으로 알고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평화의원의 자원봉사로 돌봄 간호를 하는 것에 대단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돌봄 자원봉사를 하게 된 것은 같은 동네 살면서 노환과 고혈압, 중풍, 치매로 고생하는 분들을 옆에 그냥 두고 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료적 지원 없이 자신이 그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그것이 빨갱이 병원이든 뭐든 지원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분들과 나는 이념 문제나 사회 부정과 불의, 편견들과 위생의 문제 등등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겪었다.
2부?이승용 _ 〈인천평화의료생활협동조합〉 중에서
베트남에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다시 그놈의 경실련하이텔정보교육원 때문이었다. 내가 나간 이후로 2000년의 웹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묻지마 투자가 광풍이 불어 잠시 교육사업이 반짝했다가 묻지마 투자의 몰락과 함께 그쪽 사업도 힘을 많이 잃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베트남에 있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내가 구원투수처럼 다시 교육원 원장이 되었다. 원래 내가 넘겨줄 당시 경실련과 단절을 조건으로 넘겨준 것인데,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뭔가 상호 간의 유지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 그리로 기어들어 갔을까? 그쪽의 부탁을 나는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내가 처가나 홍성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늘 그렇듯이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얼기설기 엉성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답습을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살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두 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둘로 보일 뿐인지 모른다. 그렇게 길고 긴 내 인생의 암흑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2부?이승용 _ 〈다시 서울로, 경실련하이텔정보교육원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