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다음 날 오후에 공장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공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장이 반색을 하며 반기더니 “어제 많이 취했더만, 마침 오늘 낮에 어음 와리깡이 돼서 당신 월급을 마련했다”며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직원에게는 돈 받았다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정도의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 한 열흘쯤 지났을 즈음에 체불 동료들이 다시 노동부사무소에 가자고 연락이 왔지만 나는 빠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러기를 몇 번 더 했지만 끝내 몇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또 다른 공장으로 옮겨 갔다. 몇 달이 지났을 때쯤에 나보다 좀 나이가 많은 그 공장 동료 한 사람을 만났는데 혼자만 임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원망스럽다고 한다. 내 답변은 “노동부는 가지 말고 4홉짜리 소주를 병나발 불 정도는 되어야 하고 거기다가 영창 갈 각오하고 땡깡을 부릴 수 있으면 임금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1부?박남수 _ 〈체불 전쟁〉 중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아오다가 사전 학습도 없이 노동운동의 소명감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조합원에게서 걷어드린 조합 재정은 눈먼 돈처럼 보일 수 있다. 조합비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고 공금이라는 인식을 할 만한 최소한의 양심마저 없는 조합 대표라면 내 주머니에 들어온 용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함정에 빠진 노동 귀족을 박정희 정권은 어용으로 삼았고 전두환은 5.17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정화라는 죄목으로 삼청교육대 등으로 날려 보냈다고 하지만 확인된 내용은 별로 없었고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노동운동을 작은 단위로 분해 축소 시켰다.
내가 한번 성실하게 참여하려고 했던 집행부의 상근자는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합비를 막 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내부 감사도 포기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나는 위원장에게 같은 도둑놈으로 취급받기 싫다며 대들고 부위원장직을 사임해 버렸다.
1부?박남수 _ 〈노동조합 활동으로 틀어지는 인생〉 중에서
내가 점거 농성 과정에서 맡은 역할은 조합원 교육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개의 노동조합에서는 전체 조합원 교육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조합원이 너무 알면 조합 집행부가 피곤하게 된다고 노총이나 연맹 같은 상급 간부들이 공공연하게 얘기하던 시절이었다. 파업이 장기간 진행되면 피로도가 높아진다. 이때 조합원들을 투쟁 대오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으로 시간을 배치하면 유리하다. 내용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구성하면 조합원들의 의식도 높아지고 그 뜨거운 7, 8월 태양도 견디면서 대오를 유지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 되는 셈이다. 실제 대개의 노동조합에서는 파업 기간에 조합원 교육을 집중적으로 한다.
내가 긴 해고 기간 동안 밖에서 보고 배우고 느끼고 실천했던 경험과 지식은, 공장 안에서만 생활한 노동자들에게는 공장 밖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의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 노동조합 역사를 소재로 교육하면서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서 70년대 말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나 인근 부평공단에서 일어난 반도상사 등의 사례, 그 외 전국 단위의 어용노조의 역사들은 좋은 교육 소재였다. 듣고 있는 조합원들도 새로운 사실들은 알게 되면서 재미있어하니 효과는 예상보다 증폭되었다.
1부?박남수 _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 중에서
경인 지역의 어느 신문에서는 박남수를 매도하는 기사를 사회면 톱기사로 연재하듯이 보도한 적이 있었다. 생활 쓰레기 문제는 1990년대 후반부에 전국 어디나 골치 아픈 과제이다. 인천에서도 시민운동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음식물 찌꺼기 퇴비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경인고속도로 부근의 사용하지 않는 도로부지를 구청으로부터 임대하여 개발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분리수거 제도가 도입되면 처리량이 줄어들어 수입이 감소된다고 판단한 청소업체와 결탁한 어느 신문사가 도시에 혐오시설을 설치한다고 연재 보도를 하여 지역 주민으로부터 엄청난 원망을 듣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제기해서 정정보도들 받아내기는 했지만 인격적 피해는 적지 않았고, 일부 기자들과의 관계도 불편했다.
환경에도 관심이 많았던 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도시 하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굴포천 살리기 시민모임’이라는 환경단체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부?박남수 _ 〈환경 운동과 하천 살리기 운동〉 중에서
보성여중은 기독교 학교로 성경 수업이 있었다. 2학년 때 성경을 가르쳤던 안00 목사님의 수업이 생각난다. 시험문제에 “예수는 사람이다”는 O, X 문제가 나왔고, 주저 없이 X를 골라 오답이 되었던 기억과 수업 시간에 청계천에는 너희 또래의 아이들이 닭장과 같은 공간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오늘의 예수라며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노동운동을 접하게 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안 목사님의 수업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부?나지현 _ 〈첫눈 내리던 날의 댄스와 전태일〉 중에서
비는 그쳤지만 출근하자 공장이 물에 잠겨있었고 우리는 물을 퍼내면서 서울에 간 위원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가 되어서야 접수를 마친 위원장이 도착했으나 수해가 난 상황에서 노조 결성을 공지할 수 없어 공개적으로 노조 결성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조합원들 중심으로 수군거리며 신고를 마쳤다는 것을 알렸고 중국집에 오지 못한 조합원을 중심으로 가입 원서를 추가로 받아서 일반 라인은 거의 다 가입을 시켰고 신고필증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에서 임원들이 1년이 안 넘은 것에 대해 말이 있었다고 해서 법률사무소에 자문을 넣었고 7월 30일에는 남대문법률사무소에서 회사가 업종 변경을 하여 노조 가입 대상이 1년 미만이므로 우리 노조 결성이 적법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2부?나지현 _ 〈87년 7월, 인천 여성 사업장 중 최초로 설립한 노동조합〉 중에서
88년도에 노동조합 지원활동으로 4공단의 동국무역 지원 투쟁을 할 때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는 현장에 오고 싶어 하는 여대생들을 만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한 여학생이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남성 중심, 대기업 중심이 되었는데 당신은 왜 여성 중소기업에 가서 활동을 했나? 이해할 수 없다”고 질문을 하는데 충격을 받았다. 노동운동에서 남성 중심, 여성 중심을 갈라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 노동운동에서 좀 더 소외받는 곳, 더 필요한 곳이 어딜까 생각을 해보니까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때부터 막연히 나는 마흔이 되면 여성운동 쪽에서 일하리라 생각하고는 했다.
2부?나지현 _ 〈왜 여성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나?〉 중에서
최저임금이 너무 적어서 청소 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없다고 하면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이 월급을 받는 사람이 있겠냐고 하며 통 믿지 않아서 월급봉투를 복사해서 다 돌렸다. 아무렇게나 정하면 안 된다고 했다. 상여금도 식대도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렸다. 당신들이 정한 최저임금이 이 사람들의 생계비다. 당시 강남구 학동에 있던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시위하고 공익위원들 양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 활동은 효과를 거두어 전해에 16.6% 올려 한 자릿수로 올릴 것이라던 최저임금은 12.6%를 올릴 수 있었다. 이 캠페인은 계속되었다. 다른 곳에서 관심이 없을 때 여성노조, 여성노동자회와 여성단체가 모여 캠페인도 하고 투쟁을 하면서 5년 동안 최저임금을 두 배 가까이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부?나지현 _ 〈최저임금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