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젯다에서 멈춘 시간』은 칼이나 총이 아닌 ‘기억’으로 완성하는 가장 냉혹하고 지적인 복수극이다. 작가는 리베이트 스캔들, 조직 내 배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린 권력의 침묵을 건조한 ‘업무 용어’와 ‘회의’로 묘사하며, 그 어떤 비명보다 서늘한 폭력의 순간을 포착한다.
이 소설은 사건의 범인을 찾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가’를 묻는, 우리 시대를 향한 가장 날카로운 윤리적 스릴러다. 40년을 기다린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진실의 무게. 그 지독한 고독과 서늘한 응징의 기록에 압도당할 것이다.
- 페스트북 편집부
책 속에서
1981년, 6월 18일 오후 1시 21분 서울에서 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 같은 날, 같은 시간. 멕시코 중부 도시 San Luis에서도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 한국과 멕시코에서, 한날 태어난 두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때, 사우디 최대 상업 도시 젯다. (...) 서울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의 아빠 민기태가 전송하는 텔렉스 기계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 p.9
그의 지론은 담당 업무란 관행과 지침에 따라야 하고 혼자 처리해서 부담할 책임도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관계, 특히 상급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예쁘게' 보이는 것이 최상의 전술이다. 자신의 취향대로 선택하던 친구들과 다른 구성원들 속에서는 "뜻을 알겠습니다."로 무장하는 것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무한 책임을 다 하는 길이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 p.17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그런 정도의 가정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두 다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회사에서 이런저런 사정들을 감안해서, 가장 적당하다고 만든 규정이 2년 현장 근무 후 들어가고, 새 사람이 나오는 로테이션 아니겠습니까?” (...) “자네는 모든 일을 근시적으로만 보고 있어! 크고 멀리 보아야지, 어떻게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 p.125
본부장의 ‘미사의 종’은, 오늘도 이렇게 민기태를 사지에 몰아넣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다. 온 세상의 따가운 시선들은 그의 가슴에 낙오자라고 낙인한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한다. 밤이나 낮이나 가슴이 쓰라린다.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고 자신만만 했던 기개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패잔병이다.
- p.155
민기태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저 노인의 목숨은 자신의 손으로 끊어 놓겠다고 작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의 가슴 깊이 새겨진 원한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 그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같은 직장에서 만나 함께 일하다가, 서로 헤어졌을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p.254
“당신이 야비하게 부수어버린 나는 바로 낙오자가 되고, 패잔병이 되어서 남미로 도피하여 숨었어. (...)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지 세 달 만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어. 내가 당신에게, 그토록 보고 싶은, 이제 막 태어난 아들 곁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던, 그 아들 말이야! (...) 당신의 횡포로 피신한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나에게 불어닥친 이 불행은...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당신을 처단하기로 만들었어.”
- p.293
만약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뒤흔들었던 가정이 실제 일어나게 되었다면, 이 노인의 줄기세포에는, 노인도 컨트롤 할 수 없는 DNA로 인해서, 귀가한 노인은 911 다이얼을 돌리고, 다음날 체포된 민기태와 알렉스가 캘리포니아의 감옥에 있는 동안, 이 노인은 또 다른 모임에서 ‘미사의 종’을 부르고, 때때로 마누라와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다. “어휴, 하마터면 그 놈 손에 죽을 뻔 했잖았어!”
- p.307
거대 조직이라는 정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민낯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파열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꿈틀거리는 음모, 그리고 소통의 부재가 빚어내는 비극에 대해서 말이죠. (...) 조직의 논리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무참히 파괴할 수 있는지, 그 서늘한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 작가 인터뷰
젊은 시절 회사에 다니며 상품 수출입 현장을 누볐고, 해외에서는 건축 자재 구매와 조달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이후 무역회사를 창업해 수출 전선에 뛰어들었죠. 제조업까지 병행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걸프만 입구에 물류 기지를 세워 생활용품을 비축해 두고, 인접한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지로 신속하게 공급하는 ‘재고 판매(Stock Sale)’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고요. 그때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한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의 공기가 이번 소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작가 인터뷰
멕시코는 기묘한 땅입니다. 매년 3만 명 이상이 살해당하는 폭력의 땅인 동시에 3만 개가 넘는 성당에서 사랑과 용서를 구하는 미사가 울려 퍼지죠. 살인과 구원이 공존하는 이 아이러니한 공간이야말로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민기태의 마지막 무대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민기태가 국경을 넘은 후 안써니를 처단할지, 아니면 용서할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 작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