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우리 반 강가는 공부를 1등 하는데 너는 왜 이리 공부를 못 하느냐?”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그 강가가 강기윤이라는 것을 알고, 집안 아재라고 했더니,“너의 그 아재는 공부를 잘해서 1등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때껏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는데, 1학년 1학기 때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공부에 대한 의욕이 생겼다. 가난은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먼일이지만, 공부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나도 장학생이 한번 돼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뚜렷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드디어 장학생이 되었다.
p 46~47
나는 여학생들의 목덜미를 붙잡아 바위 쪽으로 끌고 나왔고, 그 순간 인근 어부가 뗏목배를 몰고 와 구조를 도왔다.
배에 실린 여학생들은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백사장으로 옮겨진 뒤 인공호흡을 시도했고, 곧 119가 도착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학생들은 대구 출신으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의 사건은 부산일보에 작은 기사로 실렸다고 전해졌다.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내 친구 김준호는 지금도 그 일을 이야기하며 “정의롭고 의리 있는 행동이었다”고 회상한다.
구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젖은 옷을 세탁소 탈수기에 말리고 다시 갈아입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날의 추위와 파도의 거센 힘, 그리고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p 66
냉장고 사업부, 전자렌지 사업부, 회전기 사업부, 공조기 사업부, 같은 곳에서 2년 동안 연구하겠다고 기획하여, 연구 보고서를 내고 그것에 맞게 사업비를 받아야 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사업을 하려면 사업비를 받아야 했다. 그것이 승인 나기도 힘들었다. 또 특허도 내야 했고, 정보 보고서도 내야 했다.
p 87
1993년 10월 18일, 나는 공장 설립 허가를 받았다. 사직서를 냈지만, 회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를 먼저 차렸다. 사업자등록은 내 이름으로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이름으로 회사를 세웠다.
사직서는 냈지만, 회사의 사퇴 처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그 뒤 공식적으로 내가 퇴사한 날은 회사를 설립한 6개월 뒤인 1994년 5월 1일이다.
창원 의창구 팔룡동에 ‘현대 포장’이라는 공장 내에 조그마한 공장이 생겼다. 창고용으로 쓰는 100여 평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 한 귀퉁이 열다섯 평을 임대받아 쓰게 되었다,
p99
그날부터 3개월은 하루하루같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했다. 가슴 졸이며 보낸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당도한 은행 창구.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어음을 건넸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2,100만 원이라는 거액이 고스란히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대기업 LG와의 거래가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우리의 땀방울이 세상의 가치로 인정받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꽉 막혀 있던 물꼬가 터졌다. 상상 속에만 머물던 숫자들이 통장에 선명하게 찍히기 시작하자, 비로소 삶의 희망이 선명한 실체를 드러냈다
p108
그렇게 힘들게 석사를 따고 나니 이제 박사 과정은 지역 대학으로 돌렸다. 창원대에서 행
정학 박사에 들어갔다. 의정 활동하면서 너무 먼 길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2005년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지방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박사과정은 창원대학교에서 공부했다. 2010년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p117
나는 집행부를 향해 날카롭게 질문을 쏟아냈다. 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치밀하게 자료를 준비했고, 송곳 같은 질문으로 도 집행부의 허점을 낱낱이 들춰냈다. 우리는 5·6대 도의회의 기록까지 뒤져가며 현장 조사, 업무 보고, 사업 검증을 반복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2004년 무렵, 나는 ‘경남도의회의 특위 스타’이자 ‘도청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p 138
나는 지난 패배들을 교훈 삼아 더 절박하게 뛰었다. 진보의 성지라 불리는 창원 성산구에서 보수의 가치와 실용주의를 호소했다. 유권자들은 흔들리는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결과는 47.30%(61,782표) 득표. 나는 재선에 성공하며 21대 국회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무엇보다 ‘진보 정치 1번지’ 창원 성산에서 보수당 후보로 두 번이나 당선되는 진기록을 세운 순간이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온 뚝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p 157
이러한 변화와 노력에 따라 남동발전은 크게 변화했다. 그 결과, 331개 정부 공공기관 중에서 1등을 차지하며 S등급을 받았다.
국민권익위 주관 2025년 종합청렴도 평가 1등급 달성, 2025 ESG 자원순환어워즈 환경부 장관상 수상 경영평가 1등에 이어서 청렴도 평가에서도 1등을 했고 2025 ESG 자원순환어워즈에서도 환경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1년 만에 이룬 놀라운 성적은 3,000여 임직원들의 한결같은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p 204
일부 세력은 이를 권력형 비리로 악의적으로 몰아갔다. 무분별한 고소와 고발로 나와 가족의 명예는 처참히 짓밟혔다. 1년 넘게 이어진 고통스러운 수사 끝에, 2024년 1월 17일 창원지방검찰청은 내게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진실의 빛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억울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효심으로 일군 땅이 오해로 얼룩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정치인으로서 시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서는 송구하게 생각한다.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무혐의 종결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치적 공세에는 단호히 대응할 것이다. 그 땅은 내게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라 부모님의 고단한 삶이자 내 삶의 뿌리였다. 이번 시련을 통해 공정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다.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진다. 끝까지 믿어
주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p 222
모든 정책의 주인은 시민이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시민의 제안을 시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마창진 시민의 완전한 통합과 경제, 일자리, 인구, 보육, 및 교육 등 산적한 현안 사업 등의 난제도 시민의 지혜를 빌려 투명하게 정면 돌파해야 한다. 창원을 “K-방산, K-조선 그리고 AI의 글로벌 도시”로 키워 전 세계가 기억하는 이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리더십은 포용이자 혁신이다. 나의 약속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자, 우리가 함께 개척해 나갈 ‘창원의 새로운 길’이다.
이제 나는 그 길의 맨 앞에서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창원의 아침을 깨우는 장엄한 여정, 그 첫발을 시민과 함께 내딛고자 한다.
p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