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앞으로 국제정치사상은 국제정치 이론이 의심 없이 받아들인 가정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획기적인 변혁을 시도할 수 있도록 새 지평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국제정치사상은 그간 국내 문제에만 갇혀 있던 전통적 정치사상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치사상의 근간이 ‘최선의 국가’를 넘어 ‘최선의 국제 질서’에 있다는 점을 밝혀 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근대까지 개별 사상가들의 고유한 사유 체계에 기초한 진정한 국제정치사상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저자는 맥락주의와 텍스트주의 가운데 후자에 기대어 국제정치사상을 연구한다. 맥락주의에 의하면 모든 정치사상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정한다. 반면 텍스트주의에 의하면 인간사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문제가 존재하며, 고전의 저자들은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기 위해 시대를 초월하여 소통해 왔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처방은 텍스트의 표면보다는 행간에 숨어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텍스트를 엄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모든 사건, 이념, 사상은 역사적 맥락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맥락주의의 가정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지 의문을 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놀랍게도 정치사상의 오랜 전통은 이러한 맥락주의적 가정과 달리 정전으로 인정받는 텍스트를 저술한 저자들은 그들의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영속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에 따르면 홉스는 시대를 초월하여 투키디데스와 소통하고 있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통하고 있으며, 루소는 키케로와 소통하고 있다.”(『서양국제정치사상』, 35쪽)
텍스트주의에 입각한 이러한 관점은 분명 비역사주의적 성격을 띠는 측면이 있지만, 본디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통찰력을 얻는 데 있는 것이라면 텍스트주의는 그에 부합하는 유효한 연구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홉스의 사유를 살펴본다. 국가와 국제를 둘러싼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규범적 주장에서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정의가 과연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국제정치의 장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를 놓고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정의 문제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정전론(正戰論)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그로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플라톤이 제시한 정전론을 다룬다. 3부에서는 계급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고, 동시에 조화롭게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에 대해 칸트, 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생각을 보여 주었는지를 살펴본다. 4부에서는 이상적 정치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부도덕하고 탐욕적인 대외 정책 이념으로서의 ‘제국주의’ 간 역설적 결합을 주제로 밀, 로크, 투키디데스, 플라톤의 생각을 살펴본다.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근대적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고대와 근대의 시공간적 차이를 넘어 탈진보적, 탈발전론적, 탈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에 대한 보다 폭넓고 균형적인 시각을 갖는 데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