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류현주의 시에서 존재는 부재로 자신을 입증한다. 죽은 아버지와 오빠와 엄마가 그렇고, 책을 읽다가 사라진 어린 딸이 그렇다. 딸은 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딸과 이별하기), 언니의 화장대 유리 밑 사진 속에서 형부는 여전히 감나무 가지에 올라가 감을 딴다(빈 자루). 지하철 교량 구간에서는 읽고 있던 루신의 소설 주인공 아Q가 화자의 시선을 타고 한강 물로 뛰어내려 버린다(한 페이지). 류현주의 시집에서 생이란 이렇게 각각의 계기로 저마다의 시간을 향해 흘러가는 멀티버스의 중첩과 같다. 무관한 듯 존재하지만, 사실의 경계를 가뿐하게 넘나든다.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전화기 속 한번 다녀가겠다는 딸의 안부 문자가 그렇게 몸 없이 다녀가는가 하면(문자의 얼굴들) 눈밭에서 뒹굴다 젖은 털장화를 신고 실내에 들어온 화자를 남편과 딸아이는 알아보지 못한다(털장화). 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다. 실제로 없는 누군가를 밤새워 목 놓아 외치는 취객이 있는가 하면(외치는 사람) 외출 중에 화자의 머리가 사라지기도 한다(얼굴 부처). 이러한 결여와 어긋남은 화자와 세계의 비대칭을 보여 주지만, 또한 그 정념을 넘어 사물의 배후까지 투시하려는 아이러니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눈사람의 고달픈 전생을 읽는 화자의 시선에 웃음으로 화답하는 눈사람을 보라(눈사람). 얼마나 깊은가. 타자의 시선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깊다.
―이현승 시인
시인의 말
늦잠 자는 여자를 지나쳐 가는 여자가
기타를 꺼내 들고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버터와 커피와 빵 앞에서 구부정하던 여자가
새로운 그녀를 보고 있다
비스듬히 벽에 기대 책을 거꾸로 넘기는 여자가
외출을 서두른다
루주 바른 여자들이 한꺼번에 현관 앞에 선다
한 켤레의 초록 구두 속에 휘청이는 여자들이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책 속에서
<눈사람>
눈 내리는 밤 공원에
누군가 만들어 놓고 간 눈사람
전생에 한 번쯤은 사람이었던 걸까
심하게 부려먹은 손이 없네
전생에 한번은 떠돌이였던 게지
종일 걸어왔을 두 다리도 없네
볼을 한 번 꼬집으니 살점이 부서져 내려도
서 있기만 하는 눈사람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린 걸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린 걸까
아프다 할 눈 코 귀 입 하나도 없네
보고 들어야 할 세상이 모두 절벽인 사람
그리하여 온몸이 눈물로 가득 채워진 사람
누더기 이파리를 뜯어 눈을 하나 만들어 주네
잘못 든 길 돌아가려다 한밤을 서성이는
날 알아보고 웃고 있네
<一 획>
한 시인이 일곱 권의 시집을 내고 가는 동안
유명 소설가가 열 권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동안
저 강물은 오직 하나의 글자에만 매달려 있다
사람의 영혼을 매단 글자들
수억만 장의 종이 위로 구물구물 살아갈 수는 있지만
백 년이 다해 한 장의 종이로 바스러지기도 하는 일
고단한 그들 사이에서도 강물이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한 획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기 때문
쓰고 지운 흔적들은 길게 늘어나 있다
오랜 뒤척임으로
손의 힘이 빠지기도 하여
위로 혹은 아래로 구부러져 있다
긴장된 떨림이 잠시 서린 곳
옹이가 박혔을 자리마다 제 몸을 때리며
세차게 흘러간다
한 획이 깊어지는 일은 고독한 일
안개가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정오 무렵이면
발아래 북녘이 내려다보이는 강가로 가
깊어진 한강을 유심히 내려다보는 사람들
강이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내 명의의 집>
이십 년 동안 부은 적금으로
하늘의 구름집을 샀다
앉으면 깊어지고 누우면 늘어난다
다섯 시간을 달려야
모서리에 닿는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든다
지상에는 내릴 수 없는
독수리 날개 무늬 탁자와
은하수가 움직이며 떠가는 책장의 요술 문
무지개가 종일 피어오르는 커피잔
이곳에 나무를 심어
뿌리를 단단히 내려야겠어
울타리를 쳐서 튼튼하게 막아 둬야 해
지나가는 또 한 무더기의
구름 떼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