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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여래(汝來)
프롤로그 2 회자정리(會者定離)

시절인연(時節因緣)
파사현정(破邪顯正)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오당안지(吾當安之)

에필로그 1 오온개공(五蘊皆空)
에필로그 2 화엄의 바다

부록 1 대담
부록 2 권희정추모사업회 연표
부록 3 권희정 열사(1973-1996) 그리고 추모사업회(1996-2026) 30년 사진
저자 소개
저자 : 박혜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2013년 제5회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충북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오합지졸 특공대』, 『사랑, 입니까』, 동화 『아홉 계곡의 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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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데모하는 건 아니지? 넌 절대 그런 데 발 들이면 안 된다. 알지?”
“제가 가입한 데는 불교학생회예요. 종교 동아리라 데모할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선순은 딸을 믿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순은 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두었다.
“아빠 아시면 큰일 나. 절대로 데모하는 데는 근처에도 가지 마.”
“아휴,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절대로 데모 같은 건 안 해요.”
--- p.31

희정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믿는다고 했다. 민중의 선한 의지를, 민중이 가진 힘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민중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거라고. 그 길에서 잠시 주춤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 보다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굳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의 힘을 못 믿어서 그런 거라고. 인간으로서 나태하고 나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회의의 순간이 자꾸만 찾아올 거라고 했다. 그런 순간이 올까 봐 무척 두렵다면서 희정은 덧붙였다.
“가영아, 만일 내게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내 뺨을 세게 때려 줘. 정신이 번쩍 들게.”
--- p.57

옛날 옛날에 권희정이라는 아이가 있었어. 걸음이 무척 빠른 아이였지. 그 아이는 그 빠른 걸음으로 안 가는 곳이 없었어. 당시에는 하루가 모두에게 24시간이었는데, 부처님이 그 아이에게만 특별히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려 주었어. 바빠서가 아니라 착해서.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려 줘도 그 아이는 늘어난 시간을 착한 곳에 쓸 걸 알았기 때문이지. 과연 그 아이는 늘어난 시간을 힘든 사람을 돕는 데 썼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사 주고,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 걸어 주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만히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고, 화난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지. 그러고도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면 편지를 썼어. 자, 숨을 크게 들이마셔 봐. 어때, 꽃향기가 나지? 이건 그 아이가 보낸 편지야. 부처님이 너무 착한 그 아이를 대신해서 너희들에게 부쳐 준 편지야. 너희도 그 아이처럼 착하게 살라고. 그 아이가 누구라고? 그래 권희정. 내 친구야.
--- p.92

실은 이런 것들이 괴로운 것이었다. 백골단에게 얻어맞고, 최루탄 매운내에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따귀를 맞고, 무자비한 경찰의 진압에 피가 터지고, 피 터진 채 잡혀가는 것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탄압이 심해지면 배고픔도 잊었다. 더러움도 잊었다. 비참함도 잊었다. 분노만이, 오직 분노만이, 타는 듯한 분노만이 남았다. 그때는 살고 싶은 생각도 죽고 싶은 생각도 다 잊었지만, 모든 것이 잦아든 고요한 밤이 오면 이러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살고 싶어서, 너무나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두려웠다. 이토록 눈부시게 젊은 날이 꾸루룩 꾸루룩 하수도로 흘러가 버리는 것 같아서 뼛속이 시렸다.
실은 이런 것들이 힘든 것이었다. 투지로 불타올라야 하는 마음이 꾸루룩 소리에 약해지는 것. 구호와 선언과 민중가요보다 먹고 싶은 것의 목록이 더 생생히 떠오르는 것. 화강암처럼 단단하다고 믿었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마음이 실은 밀가루 반죽처럼 무르기 그지없는 것이었다는 것. 아침의 마음과 밤의 마음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 어쩌면 밤의 마음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것.
--- pp.105-106

청춘이어서 그럴 게다. 별게 다 죄스럽고 심각한 것은. 이토록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감한 것은. 그러니까 그때 혜연이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때문에 대중이 운동권을 욕하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하는 게 운동권은 아니다. 어떤 운동권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운동권은 모르는 게 많아서 시시각각 흔들린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치는데도 그들이 뭔가 아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면, 그건 그들이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조국 통일, 노동 해방, 미군 철수, 양심수 석방, 의문사 진상 규명, 학원 자주화 같은 것들.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게도 용감할 수 있는 것이다.
--- p.133

미선은 처음으로 집회에 나가던 때가 생각났다. 집회에 나가기 전 두려워하는 미선에게 희정은 말했었다.
― 한총련은 빨갱이도, 폭도도 아니야. 우리는 단 한 번도 국가를 전복하려고 한 적이 없어.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알리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이 나라를 좋은 곳으로 바꾸었으면 하는 거야. 우리 모두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거지. 진정한 민주주의를 말이야.
그런 세상이 올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던데,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리면 우리 모두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날마다 자주를 외치는 희정 언니는 정말 그런 날이 올 거라 믿는 걸까? 희정이 말을 하면 할수록 미선의 마음속 슬픔이 커져만 갔다. 그 슬픈 와중에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4학년이 되면 희정 언니처럼 될 수 있을까? 똑똑한 바보. 그 슬픈 와중에 미선은 얼토당토 않게도 그런 것이 한번 돼 보고 싶었다.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 그것이 무엇이기에 희정이 그렇게도 목을 매는 것인지 한 번쯤은, 아니 한 번만이라도 되어 보고 싶었다.
--- p.201

“제가 아니면 누가 해요. 후배들은 발로 뛰어야 하는데, 굶고 어떻게 뛰어요.”
“너는. 너 없으면 조직 자체가 흔들려.”
“제가 왜 없어요. 학자 승리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건데요.”
“그러다 큰일 나. 너는 제발 좀! 더 멀리 내다볼 수는 없는 거니?”
안타까운 마음에 성숙의 입에서 큰소리가 나왔다. 머리 굴리지 않고 당면한 문제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게 성신여대가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이렇게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문제들만 바라봐서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희정은 정책국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중략)
“언니, 우리 반드시 승리해야 해요.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는 못 일어나요.”
“이 싸움이 다가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승리한 이후라야 다음 싸움도 있어요.”
--- pp.253-254

학생들의 울음소리와 구호가 성신의 하늘을 뒤덮었다. 희정의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만장과 깃발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엔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수정대에 올라가 소리통을 하는 희정, 사범대에 창고처럼 딸린 〈물결〉 소모임 방에서 날적이를 적는 희정, 불방에 마루를 까느라 목재상에서 이고 지고 온 송판에 탕탕 못을 박는 희정, 회의를 하다 말고 후배들에게 먹일 라면을 끓이는 희정,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으며 끄덕끄덕 조는 희정, 집회하는 학생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 내는 교수들에게 조곤조곤 대드는 희정, 학우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이마를 약간 찡그린 희정, 교리 공부 시간에 공책 한가득 꽃을 피워 놓는 희정, 가을의 낙엽 봄의 꽃 한여름의 태양 한겨울의 눈송이가 아름다워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희정, 있는 돈 다 털어 밥 사 주고 여기저기 차비를 꾸러 다니는 희정, 지독한 몸치이지만 집회에 나가서는 펄펄 날아다니는 희정, 매일 웃는 희정, 그렇지만 아주 가끔 화가 나면 무서운 희정, 우주 소년 아톰처럼 작고 강한 희정, 웃으면 눈이 초승달처럼 굽는 희정, 까만 피부와 곱슬머리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 희정, 감 성에 젖는 날이면 남몰래 사랑을 하고 싶은 희정, 김광석이 죽었다고 펑펑 우는 희정, 언제나 자주적인 사람이 되길 꿈꾸는 희정, 더 좋은 세상에서 더 좋은 꿈을 꾸고 싶은 희정……. 수많은 희정이들이 희정을 따르고 있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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