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10편에서는 고려시대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인 윤관의 9성 개척의 지리적 범위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글은 쓰다 소키치의 「윤관 정략 지역고」(『만선역사지리연구』)와 함께 함흥설을 대표한다. 현재 한국사학계에는 정설이 없는 상황이다. 기원전이나 삼국시대도 아니고 1100년대의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작지 않은 문제로 볼 수 있다. 함흥설을 비판하려면 이 두 논문을 철저히 분석해 반론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사료에 나오는 거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아래는 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윤관이 새로 쌓은 6성의 이름을 아뢴 것은 함주 대도독부사와 4주 1진의 방어사가 임명된 2월 13일 이전이며, 유형약을 보내 승리를 알린 무렵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6성의 건설은 늦어도 예종 3년(1108) 정월 말, 곧 정벌군이 출발한 날부터 한 달 반 안에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400쪽)
21편에서는 철령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철령 이북을 반환하라는 명의 요구에 대해 고려는 처음에 함경도의 철령으로 오해했지만 그것이 아님을 명확히 지적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인데도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아직도 정설이 없는 상태다. 관련하여 본문에서 이케우치 히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명이 말한 철령은 결코 함경도 남쪽의 고갯길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848쪽) “명이 철령이라고 부른 곳은 반드시 강계(만포) 맞은편 황성黃城(皇城) 부근이 돼야 한다. 『명실록』(권189)의 다음 기사도 그것을 증명한다.(849쪽) “요동도사가 지휘 두 사람을 보내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계에 와서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두 번째 보고가 도착하면서 그 철령위는 고려인이 잘 알던 황성黃城(皇城)이라는 것은 이미 판명됐다고 생각된다.(873쪽)
“대부분의 일처럼 학문도 교류와 소통, 비판과 조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비판하려면(또는 인정하려면) 전체를 더 충실하고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 생각에서 이 번역을 시도해봤다.” _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