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최정희의 첫 번째 장편소설 『녹색의 문』과 그 속편 『속·녹색의 문』(연재할 때의 제목은 『흑의의 여인』)은 일제 말기 서울에서 하숙하던 두 여학생 유보화와 도영혜의 굴곡진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도영혜는 같은 집에 하숙하던 남학생 김영서를 따라 반일 시위에 참여하고 일본 유학까지 쫓아갈 정도로 그를 흠모한다. 미술을 전공한 유보화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영서와 사랑에 빠진다. 두 여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김영서는 그녀들과의 연락을 끊고 잠적하였으며, 도영혜는 미혼모가 되고, 유보화는 다른 남자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
『녹색의 문』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성에게 지배받으며 의존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여성들과 친일파든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여성에게는 무책임하고 가혹한 남성들을 대비시키며 남성의 본질적인 이기심과 비열함을 얘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해방 후 미군정 점령기를 거쳐 건국된 우파 민족주의의 반공국가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그 도덕적 정당성에 의문을 던진다.
'해제' 중에서
(전략) 『녹색의 문』은 일간지 및 월간지에 연재된 소설이니만큼 처음부터 대중 독자를 강하게 의식하고 쓰였으며, 특히 여성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삼는다. 그런데 최정희는 이 주제를 쉽고 유쾌하고 편안하게만 다룰 수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에서 「녹색의 문」 연재를 시작할 당시 최정희는 두 번의 굴곡 있는 결혼 생활을 거치고 난 후 홀로 두 딸을 키우고 있었다. 최정희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깊은 분노와 억울함을 느껴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험으로 인해 여성에게 있어 남성과의 관계란 결코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불행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이로써 『녹색의 문』은 신생 반공국가 대한민국에 반(反)하는 불온한 활동 예컨대 친일 활동이라든지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과거의 책임을 여성에게 물을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유보화와 도영혜가 친일 행위를 하거나 좌익 운동을 했던 것은 각각 친일파 남성 이성배와 공산주의자 남성 성완수와 어쩔 수 없이 성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며, 이 관계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서가 유보화와 도영혜에 대한 책임을 비겁한 방식으로 회피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유보화와 도영혜는 처음부터 김영서가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보았으며 그에게 기꺼이 종속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살 길을 이기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 여성들을 버렸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그때그때 자기 살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여성들이 범한 죄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이 여성들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대한민국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살든 죽든 버려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대한민국’을 배신했던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한경희(한국학중앙연구원 신집현전 태학사 과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