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피는 것과 지는 것이 나란히 있어 정원은 결국 균형을 찾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옇게 일어나는 일상의 고민들이 씻겨 내려가기를. 지나갈 것들은 지나가고 남아야 할 것만이 남아 있기를. (p.26)
봄이 왔다. 매 계절이 그렇듯 덤덤히 왔다. 몇 달간 서리를 견뎌 낸 눈들이 하나둘씩 터지고, 새로 돋은 모든 잎이 새것이다. (p.51)
정원의 위치와 형태마다 식물들이 자라는 모양이 다르고, 하나하나에 다른 세계가 고여 있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넘나드는 담장, 비가 오면 물이 찰박찰박 고이는 웅덩이, 몇 번을 심어도 영 자리를 잡지 못하는 아스트란티아와 빈틈만 보이면 뿌리를 뻗어 제 땅을 넓히는 빈카. 나이를 많이 먹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사과나무에는 아이들이 타고 올라가 여기 좀 보라고 소리치던 짱짱한 목소리가 아직 묻어 있다. 몇 년 전 고양이별로 떠난 레오를 묻은 구석에는 꿩의다리가 높게 자라고 인동덩굴은 번듯한 담을 마다하고 자꾸만 무화과나무를 타고 오른다. (p.70~71)
눈앞에 핀 꽃도, 무화과나무를 오르내리는 아들의 보드라운 복사뼈도, 일요일 오전 10시쯤 정원 가득한 봄볕도 잠깐 머물다가 곧장 과거로 흘러간다. (······) 그 순간들은 어디선가 곱게 쌓이고 어떤 형태로든 다시 솟아난다. 이처럼 시간을 붙들 수는 없지만 영영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정원은 가르쳐 준다. (p.95)
오래 입어 볕에 색이 바랜 남색 면 재킷을 걸치면 어제의 냄새가 난다. 퇴비를 깔았으면 쿰쿰한 흙 냄새가, 쥐똥나무 울타리를 정리했으면 나무 냄새가 난다. (······) 그렇게 어제가 묻은 채로 오늘을 시작한다. (p.101)
그냥 두면 더 넓게 자라 볕도 많이 보고 꽃도 더 많이 피우겠지만, 이 정원에서 내가 줄 수 있는 공간이 여기서 저기까지뿐이네, 미안. 그래도 잘 자라 줘서 고마워. 식물들이 불평하거나 삐지는 일은 없더라도 이렇게나마 말을 걸어 본다. 가지를 자르는 일을 ‘정원 관리’라는 좁은 틀로만 보지 않고 나무와 내가 서로의 한계 안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는다. (p.118~119)
잔디, 화단, 창고, 석판 등으로 구획되고 울타리로 이웃과 나뉘지만, 정원은 서로 얽혀 있고 바깥과도 이어져 있다. 흙 속 벌레는 울타리를 넘나들고 나와 이웃의 화단은 같은 볕을 받으며, 계절은 모든 정원에 공평하게 찾아온다. (p.120~121)
나를 따라 아이들도 제 그릇에 깻잎을 양껏 올린다. 처음 먹었을 때는 익숙하지 않아 깨작거리더니 이제는 그 맛을 알겠다는 듯 잘 먹는다. 아빠는 머리가 검은색이네. 친구들은 김치를 모른대.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아이들은 아빠가 동양인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 간다. 지금은 나를 마냥 좋아해 주지만 커 가면서 더 명확해질 아빠의 ‘다름’을 아이들이 잘 받아들여 주기를. 오늘 저녁 먹는 깻잎의 기억이 아이들과 나를 연결해 주기를. 정원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깻잎에 많은 것을 기대어 본다. (p.139~140)
걷다가 우연찮게 만나는 꽃들도 좋지만 한 겹 기억이 묻어 있는 꽃들은 더욱 특별한 까닭이다. 직접 파종하거나 삽목해서 키운 아이들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 역시, 돈 몇 푼을 아껴서가 아니라 거기에 묻어 있는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다. (p.148)
채워지는 것이 기뻤던 봄과 달리 여름 정원은 비울 때 기쁘다. 생기 있는 부분은 남기고 세월의 피곤함만 걷어 낸다. 그렇기에 여름 화단에서 중요한 것은 ‘바라봄’이다. (p.149)
그러나 많은 꽃을 알게 된 10년 차 정원사에게 무궁화는 유독 반갑고 그리운 고향의 꽃이다. 서울에서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고향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던 것처럼. 고향을 촌스럽다 여겼던 것도, 무궁화를 외면했던 것도, 그때의 내가 작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p.168)
하루하루 빛이 바래는 수국도 늦여름 화단의 자연스러운 제 모습이니 그대로 둔다. 정원의 꽃과 나무, 공기에서부터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와 달큼한 흙 내음은 이미 충분하니 그 속에서 서성이는 나의 발걸음이 아름다운지 고민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한 계절의 끝은 다음 계절의 시작이 되고, 그 이음새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시들어 가는 수국이 새로 피어나는 추명국에게 알맞은 배경이 되는 것처럼. (p.176)
알뿌리는 내년을 향한 믿음으로 심는다. 이른 봄에 피어날 알뿌리를 한 해 전 가을에 심기에, 정원의 시작은 가을이라는 말도 있다. (p.192)
낙엽을 치우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That’s a losing game.(질 싸움을 하고 있네요.)”라며 한 마디씩 보탤 때가 있다. 그러면 “I will lose if I aim to remove all the leaves. But my aim is to remove 80% of them, so I always win.(다 치우려고 마음먹으면 지겠지만, 8할만 치우는 것이 목표라 매번 이깁니다.)”라고 대꾸한다. 하늘은 높고 나뭇잎은 떨어지니, 기지가 절로 생긴다. (p.222)
꽃과 나무들이 잠시 쉬고 흙이 꽝꽝 언 1월은 새로운 계획을 떠올리기에 좋은 계절이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작년의 나날들은 겨울의 채반에 걸러진다. 부드러운 일상의 장면들은 구멍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스미고, 곱씹어야 할 것들만이 남는다. 제법 알맹이가 굵은 기억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본다. (p.261)
가지마다 묻어 있는 나무의 시간을 읽고, 이렇게 자라야만 했던 이유와 노력을 이해하려 한다. (······) 해가 뜨고 지는 방향, 작년 여름 매섭게 바람이 불던 날, 초봄 예기치 않게 내렸던 늦서리······ 모든 기억이 가지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아무리 날이 선 전지가위를 들고 있다고 한들, 그 시간들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가지치기는 그저 깊이 없이 허둥대는 얕은 노동일 뿐이다. (p.281)
삼지구엽초의 헌 잎도 이맘때쯤 모두 자른다. 역시나 일 년에 한 번 잠깐 피는 꽃을 더 잘 보기 위해서다. 초봄에 피우는 작고 여린 꽃과 더불어 새로 돋아나는 보드라운 새잎도 보기 좋다. 세 개의 가지와 아홉 개의 잎을 지녔다 해서 삼지구엽초. 하지만 일일이 세어 보는 것은 반칙이다. (p.289)
정원이 있는 세계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그때, 꽃과 나무들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이었다. 어려운 라틴어 학명들은 그 자체로 어떤 무게감을 지닌 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고, 그 이름들의 무게는 나의 마음을 정원에 깊이 내려앉히는 무게 추가 되었다.
그렇게 학명으로만 외던 식물들 중에서, 천리향은 처음으로 한글 이름을 되찾은 나무다. ‘Daphne odora’라는 낯선 이름으로 부르던 나무가 천리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 한편에서 무엇인가가 허물어졌다. (p.29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