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인류세의 인프라: 환경, 행성, 디지털 미디어
인프라적 고찰이 결국 부각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환경, 행성과 초실재를 인프라로 사유하는 일은 인간의 중심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그것은 인간중심적 인프라를 탈인간중심적 인프라로 재건하고, 이를 통해 인류세의 다중 위기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선과 어떤 정의를 추구할 것이냐는 문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1부 ‘환경과 인프라’는 인류세 담론과 인프라 담론의 교차점에서 환경으로서의 지구를 인프라로서의 행성으로 재사유할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행성 인프라는 자연으로서의 환경과 문화로서의 인프라라는 이분법에 도전할 뿐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너머에서 확장된 타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요구한다
2부 ‘행성과 인프라’는 인류세 담론 앞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생태학의 관점에서 인프라로서의 행성을 고찰한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생물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인 생태학을 해법으로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을 인간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생태학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탈피할 때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이 동등하게 얽혀 있는 전체로서 행성, 더 나아가서 우주라는 범주를 얻게 된다. 행성과 우주의 눈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고찰할 때, 우리는 인간중심적 생태학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3부 ‘디지털 미디어와 인프라’는 인프라의 외연의 또 다른 확장을 추구한다. 행성과 우주로의 확장이 규모 면에서의 확장이라면, 초실재로의 확장은 실재 너머로의 확장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가상 세계를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몰, SNS,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미디어에서 거리와 특정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생산과 소비를 하고 있다. 그러한 한에서 가상 세계 역시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구조, 즉 인프라다.
책 속에서
기후-인프라 개념을 통해 기후를 인프라로 포섭하는 것은 기후를 전면적으로 전경화하는 ‘인프라 반전’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인프라 인문학은 기후를 정치화하고 사회적으로 맥락화할 수 있으며, 인류세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를 인프라 위기로 재개념화할 수 있다. - 70쪽
관객이 이끼와 나무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개미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둥근 형태의 VR 헤드셋을 쓰면 방금 전까지 보던 동일한 숲이지만,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인간의 눈에 선명한 초록색이던 잎사귀와 풀들은 마치 탈색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투명하게 비워진 것 같았던 대기는 형형색색의 물질들로 일렁인다. 이 작품에서 ‘비인간 생명이 바라보는 세계’를 개념화하고 구현한 모습은 예술적 맥락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층, 이를테면 어린아이들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 101쪽
센서, 광케이블, 인공위성이 해저에서 우주까지 지구의 표면을 촘촘히 채워 가는 세상에서 지구는 더욱 계산 가능한 존재로 변모한다. 더 많은 컴퓨터를 생산하기 위해 지구의 깊숙한 속을 파헤쳐 광석을 채굴하고 가공하는 정보 산업의 현장은 지구 곳곳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컴퓨터를 자연환경과 무관한 독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지층을 구성하는 ‘기술 경관’으로 인식하는 향후 연구들은 컴퓨팅 기술이 지구에 가져오는 변화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 148쪽
사물 정치는 인간을 탈중심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정치적 실천의 중심으로 만든다. 비인간에게 목소리를 주는 역할은 인간만이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사물 의회에서 대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이처럼 비인간의 이해관심을 대변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물 의회는 성립할 수 없고, 우리는 혼종에 대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비인간의 대변이라는 책임을 지고 정치적 실천의 중심이 된다. 이에 따라, 탈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을 정치적 실천의 중심으로 만들되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탈중심화하는 데에 있다는 역설적 상황이 생겨난다. - 178쪽
현대는 다중 위기의 시대이다. 이것은 위기의 성질이 단일하지 않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단일한 분과학문으로는 인식은 물론이고 올바른 대응 방식도 모색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는 20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근대적인 분과학문 체제의 탈구축을 요청하고 있다 - 222쪽
오직 국익에만 기초해서 행동하는 것은, 단순히 외부자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국가 시민들의 관점에서도 부당한 것이 된다. 만약 시민들이 국익만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편협한 관점에서 지지한다면, 이는 이들 시민들도 마음권의 공화국에서 정당성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한다. - 257쪽
기후정치의 효과를 자아내는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를 살피는 심-폴리스는 근대 정치사상의 한계를 단일한 대문자 인간 다수로만 정치적 주체를 확정한 바를 비판한 차크라르티의 지적과 조우한다. 인류세라는 문제적 상황에 직면한 데서 출발하는 심-폴리스는 인간의 지식, 이해관계, 열망만을 무대화하는 정치에 저항하며, 생명 형식의 다수자인 비인간 미생물과 더불어 실패하며 공생하는 크리터들의 집합체인 홀로바이온트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비롯한 새로운 실존 방식의 창출을 정치적인 것의 어젠다로 제기한다 - 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