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나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빨리”
생존과 낭만이 충돌하는 리얼리즘의 카타르시스
이번 시집의 강력한 매력은 환상에 기대지 않고, 우리 삶의 비루한 조건들을 시의 한복판으로 성큼 끌고 들어온다는 점이다. 고선경의 시에서 사랑은 더이상 뜬구름 잡는 추상어가 아니다. 화자는 사랑을 나누는 천사 앞에서도 천장만 보며 “이 집 보증금이 삼천이야”라고 읊조리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입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기도”를 드리자면서도 “나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빨리” 끝내자고 서두른다(「엔젤 오브 시티」). 이처럼 시인은 부동산, 출근, 영수증, 모바일 청첩장 등 일상적인 소재를 동원해 동시대인이 겪는 피로감을 정조준한다. “우리는 이 케이크를 먹고 헤어지고요/남은 마음은 포장하고요”(「Guilty Favorite」)라며 이별조차 테이크아웃하듯 경제적으로 처리하려는 태도는 시대상을 리얼하게 반영하는 동시에, 팍팍한 현실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뼈아픈 공감과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너를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너를 위해 돈을 벌고 싶다”(「눈 내리는 3월에 떠오른 좋은 생각」)라는 역설적인 선언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의 동기가 ‘노동의 목적’으로 치환된 이 씁쓸한 구절은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가 건넬 수 있는 애틋하고 숭고한 고백으로 읽힌다.
달콤한 과즙 이면의 서늘한 향기, 그 감각의 범람
파괴를 무릅쓰고 기꺼이 들이켜는 매혹적인 독주 한잔
나아가 『러브 온 더 락』은 한편의 하이틴 누아르를 보는 듯한 강렬한 후각적 심상이 뒤따른다. “향기의 범람”이자 시집 곳곳이 “후각이라는 코드로 이루어져 있”(해설, 인아영)기에 시적 경험의 밀도가 높다. 멸망하고 끝난 뒤에도 “사랑보다 오래 버티는 냄새”(「사랑과 자유와 평화」)를 집요하게 붙잡아, 지금 여기의 생생한 감각으로 되살려놓는다. 달콤한 과일 향으로 우리를 유혹하던 화자는, 기어이 “껍질이 두꺼운 열매를 짓이기고 난 다음의 감정”(「러브 온 더 락」)을 직시하게 한다. 상처 입고 물러터진 감정들을 부수고 짓이겨 얻어낸 맑고 독한 진심,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잔의 칵테일이다. “나는 더 망해야 한다는 것을//그리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후르츠 멜란지」)라고 선언하는 화자의 뻔뻔하고도 씩씩한 태도는 불안한 시대를 견디는 새로운 에너지를 뿜어낸다. “아찔한 빛깔로 열린 열매의 내부에서 폭죽이 터지듯이”(「러브 온 더 락」) 기꺼이 망가지고 짓이겨지며 사랑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겠다는 파괴적인 선언은 묘한 쾌감마저 안긴다.
기꺼이 망가지는 우리들의 아름답고 찌질한 블루스
상처받은 당신에게 건네는 맵고 달콤한 위로
『러브 온 더 락』은 사랑마저 피로해진 이 시대를 버텨내는 우리 모두의 찌질하고도 눈부신 자화상이다. 독자들은 자조와 위악으로 무장한 화자의 고백 앞에서 킥킥대며 웃다가도, 어느새 서투르게 삐걱거렸던 자신의 지난 연애와 고단한 일상을 떠올리며 가슴 한편이 시큰해짐을 느낀다. 돈과 생존이라는 거대한 농담 속에서도 끝내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고 마는 우리의 벅찬 삶은, 비루하지만 찬란하기 때문이다.
차갑고 단단한 현실 위로 쏟아진 이토록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사랑의 기록은 평소 시를 즐겨 읽지 않던 독자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을 것이다. “단 한 페이지만 마셔도 그녀가 숙성시켜온 일생에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싱어송라이터 한로로의 추천사처럼, 고선경이 내미는 이 눈부신 잔을 기꺼이 받아들길 권한다.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맵고 달콤한 세계에 당신도 완벽하게 취해버리고 말 테니.
시인의 말
진짜 사랑으로 바글거리는 것 같았다.
2026년 4월
고선경
추천사
고선경의 텍스트는 당도 높다 이름난 모든 과일이 착즙된 향을 폴폴 풍긴다. 가공되지 않은 생과일 특유의 향이 코끝을 찔러올 때면 웃음이 마구 터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뒤틀리다 눈물이 난다. 나는 그녀의 시를 접한 이후로 단순히 귀여워 보이던 것들을 더이상 귀엽게만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서 끝없이 탄생되는 단맛의 반대편을 이 시집에서 툭툭 던져낸다.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이란 물이 지구를 차지하는 비율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기에. “너는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지만/나는 사랑에 실패하지 않지//그걸 배우러 너랑 여기에 온 것 같아”라고 읊조리는 사랑에는 어떠한 껍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꾸밈없는 목소리는 스스로 낯부끄러워 꽁꽁 숨겨두었던 내 사랑마저 훅 낚아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 대신 외쳐주는 것만 같다.
『러브 온 더 락』은 술을 잘 모르는 내가 눈으로 대충 훑어도 알딸딸해지는 와인의 맛을 지녔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니 와인 한 병으로 전신 샤워를 마친 내가 남아 있다. 그런데도 전혀 찝찝하지 않다. 오히려 내 피부 위에서 끈적이는 글자들을 킁킁대다 혀를 대어보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어난다. 무취의 세계에서 그녀가 부어주는 시들을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한 페이지만 마셔도 그녀가 숙성시켜온 일생에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 한로로 (싱어송라이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