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름 요하난(????????)에서 유래하며, 이 이름의 헬라어 음역이 요안네스다. 히브리어 요하난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요한의 히브리어 이름의 유래는 ‘테힌나’(?????????)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라는 뜻이다. 즉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의미다. 정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사가랴에게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어 주며 이를 분명히 하신다.
--- pp.29-30
- 천둥과 번개 같은 성품으로 자신의 영욕을 위해서 예수를 따랐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우편과 좌편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예루살렘에 처음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지극히 세속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화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변화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넘어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조차 내어 주는 숭고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야고보는 바로 그런 삶을 실천한 전설의 사람이 되었다.
--- pp.39-40
-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막 5:1-20)는 먼저 정결의 문제로 시작한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한 예수는 거기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다. 여기서 ‘더러운’이라는 말은 ‘아-카타르토스’(?-κ?θαρτο?)다. ‘카타르토스’는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통해 익히 아는 ‘정화’(淨化)라는 뜻으로, 깨끗이 씻어 내어 시원하게 한다는 의미인 ‘카타르시스’(κ?θαρσι?)와 어원이 같다.
--- pp.41-42
- 교회 안의 두 가지 봉사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으로 양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의 봉사를 마르다가 선택한 식탁의 봉사가 앞설 수는 없다. 사실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에서는 둘 다 필요하다. 다만 우선순위의 문제다. 말씀의 길에 확실히 선 사람이 봉사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순서가 바뀐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봉사보다 봉사하는 사람이 중심에 오고 자꾸 무게가 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 pp.55-56
- 눈을 뜨고 있으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면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그 길을 갈 수 있고, 육신의 눈도 더 밝아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바디매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본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아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초청하는 제자의 길, 제자도를 갈 수 있다.
--- pp.64-65
- 예수의 말대로 그가 가진 전부가 ‘두 렙돈’이었다(막 12:44). 당시 일용할 양식인 세 끼의 빵을 사려면 약 12분의 1데나리온, 최소 10렙돈 정도가 필요했다. 2렙돈이라면 빵 한 조각을 겨우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날 먹고살아야 하는 그 과부의 생계(β?ο?, 비오스) 전부다.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고사는 가난한 과부는 왜 그 한 끼를 포기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칠 생각을 했던 것일까?
--- p.83
-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은 경계의 담을 허무는 사건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를 가로막던 민족과 신앙의 벽,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는 사회적 차별의 벽, 죄와 수치로 자신을 가두었던 절망의 벽이 예수 안에서 모두 무너진다. 사마리아 여인은 더 이상 홀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지 않는다. 숨어 살지도 않는다. 이제 그 안에는 생명의 물, 살리는 물이 샘솟기(活泉) 때문이다.
--- pp.116-117
-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다시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한다(요 11:53). 그럼에도 그 예수는 나사로를 그리고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우리를 큰 소리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엘-아자르야, 나사로야, 지금 당장 거기에서 나와라!”
--- pp.136-137
- 계시는 고전 헬라어로 ‘아포칼륍시스’(?ποκ?λυψι?)다. 아포칼륍시스는 뚜껑이 열려 있는 상자를 말한다. 반대로 ‘칼륍시스’는 뚜껑이 닫혀 있는 상자를 말한다. 뚜껑이 닫혀 있는 상자가 눈앞에 있다면 누구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궁금해서 그 뚜껑을 열고야 만다. 그러나 계시는 그 반대다. 뚜껑이 열려 있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성경이 그렇다. 뚜껑이 열려 있다.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열려서 계시되었다. 숨겨져 있는 책이 아니다.
--- pp.152-153
-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 즉 목사(木死)다. 유대인들의 심성 속에서는 당연히 알레르기를 일으킬 만한 그림이다. 바울도 이를 의식했는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스캔들’(scandal)이라고 했다(고전 1:23). 헬라어 ‘스칸달론’(σκ?νδαλον)에서 유래한 스캔들은 오늘날 ‘추문’(醜聞)이나 ‘가십’,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 정도의 뜻으로 쓰이지만, 1세기 당시에는 ‘걸림돌’, ‘덫’, ‘함정’이라는 말의 동의어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전하는 것이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라는 뜻이다.
--- p.184
- 니골라, 니콜라우스라는 이름에는 이렇게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그의 이름은 초기 기독교의 봉사자 7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소아시아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이단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신앙의 길이 그렇다. 그 밝음과 어두움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깊은 어둠에 빠져 버리고 만다.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