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에게 시간성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킨 모티프는 “연두”이다. 시인에게 연두는 어린 생명과 희망과 봄을 가리키는 시간의 지표이다. 시인은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연두는 먼 과거이며 유년의 시인이고, 노년의 시인에게 연두는 현재이며 시인의 “첫 손주 유담이”(「시인의 말」)이다. 그렇지만 연두는 과거-현재-미래의 선형linear적 시간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선형적으로 오가며 모든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반복되며 부활하는 시간이며 모든 시간에 힘을 불어넣는 에너지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시간이라기보다 차라리 사건이며 시인을 본래적 삶으로 끊임없이 회귀시키는 힘이다. (중략)
이 시집이 보여주는 안준철 시인의 삶의 모습은 대체로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정제되어 있다. 그는 삶의 작은 파도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관조와 성찰의 깊은 시간성 속에 자신을 담가 놓는다. 그는 수시로 죽음의 미래를 환기하며,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도 진정으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궁구한다. 죽음의 시간성에 대한 그의 사유는 존재의 본래성을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그런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죽음마저도?-?소멸이 아닌?-?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으로 읽어낸다. 이 시집은 마치 수도사처럼 이렇게 깊은 시간성을 통과 중인 한 영혼의 아름다운 발자취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 단국대 명예교수) 해설 중에서
저자의 말
다시 봄이다.
오래전, 어머니가 연두인 나를 바라보셨듯이
연두의 연두의 연두인 첫 손주 유담이를
할머니가 된 아내가 바라보고 있다.
무얼 더 바랄 것인가?
다만, 내 가난한 시가 세상의 마을로
한 발짝만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책 속에서
<오래된 아침>
아침 일곱 시 반
밤새 내 투정을 받아주느라 흐트러진
이부자리 가지런히 해놓고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게
읽어댄 책도 제자리에 얌전히 두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내 발로 걸어 나와
아침을 맞으러 갈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한 달 두 달은 아니겠고
일 년 이 년도 아니겠고
그 이상은 모르겠고
십 년인들 이십 년인들
살아온 날을 생각하면
눈 깜짝할 새겠지만
딴은, 이월에서 삼월이 얼마나 멀더냐
헐벗은 가지에서 새 움이 돋고
매화에서 살구꽃까지가 얼마나 멀더냐
어젯밤 운동장을 돌다가 말고
맨발로 서서 본 별빛은
멀고도 먼, 아슬하고도 아슬한
과거의 과거의 과거가 보내온 윙크인 것을
저 우주 끝에서 막 당도한
이 오래된 아침이라니!
<연두>
이런 생각을 왜 처음 해보는 것인지
사흘 전, 귀 빠진 날이었다
오랜만에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어머니 생각이 난 것인데
연두 때문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머니도 날 낳으시고
며칠 뒤라도 몸이 우선해져서는
마당에 나오셨다가
연두를 보셨겠구나
나도 어머니에겐 연두였겠지만
아니, 내가 더 연두였겠지만
먼 산의 연두보다도
더 연두였겠지만
아, 당신 품 안의 연두와
봄 산 먼발치의 연두를
번갈아 바라보셨겠구나
갓 오십에 꽃잎 떨구신 어머니는
살아보지 못한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아른아른한 봄날
그립습니다, 어머니!
<무용(無用)에 대하여>
정년 퇴임 후 십 년이 지났다
휴일도 아닌 평일에 점심 먹고 집을 나와
시내버스 타고 전주한옥마을에 와서
오후 내내 꽃소식이 당도했는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동안
나를 찾는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
이 한산함이라니!
꽃들의 영정사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도 못 되고
만 사흘을 피다가 갔구나
어제 찍은 사진은 영정사진이었네
꽃 진 자리에 잠자리가 앉아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잠자리가 찾아올 것이다
내게 잠자리를 보내신 이가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뇨
물으시면 할 말이 하나 더 생겼다
전에는 이렇게 대답을 할 참이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왔습지요, 라거나
또 몇 가지가 있었다
꽃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다가 왔노라고
이제는 말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