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스물네 절기에 담긴 농부의 정직한 땀방울과 소설가의 깊은 심미안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흐르는 스물네 절기의 흐름을 큰 축으로 둔다. 그러나 단순한 연대기적인 구성이 아니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4년 동안 농부 이동현이 마주하고 기록한 같은 절기들을 한데 묶었다. 독자들은 매월 4년 치의 절기를 나란히 살피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어떤 풍경이 달라졌는지 또 변함없는지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김탁환의 깊고 따뜻한 통찰이 담긴 에세이 「물꼬와 둠벙」은 미실란 20년의 시간을 단단한 나이테로 드러낸다. 김탁환은 농부 이동현이라는 개인뿐 아니라 오랜 시간 미실란을 지켜온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아가 미실란이 꿈꾸는 미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천년 숲’의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떻게 뿌리내려야 하는지 보여준다.
미실란은 이제 곡성에서 단순한 쌀 생산 기업을 넘어, 지역의 생태·문화예술 거점지로 자리 잡았다. 곡성 지역 유치원생이 논을 체험하는 생태학교, 광주 지역 초등학생과 함께 지은 ‘한 평 논’을 비롯한 교육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 밖에도 자력으로 매년 개최하는 작은들판음악회와
섬진강마을영화제, 김탁환이 책방지기로 있는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문화 활동이 어떻게 지역 소멸의 위기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인생도 농사도 기다림이니, 그저 싸목싸목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AI 기술로 대체되는 시대, 그럼에도 손 모내기와 친환경 농법이라는 고된 길을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한 그릇 밥에 담긴 하늘과 땅, 이웃을 발견한다. 책 곳곳에는 생명들을 환대하고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매년 섬진강 들녘에 날아온 기러기 가족을 위해 발아현미를 아낌없이 뿌려주고, 추운 날 떠돌이 개에게 집을 내어준 미실란 개 ‘흑미’에게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양보의 미덕을 배운다.
“돈이 되고 안 되고를 판단 근거로 두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씨앗을 잃고 맙니다.” 두 저자의 대담에 담긴 이 메시지는 미실란이 지난 20여 년간 지켜온 철학이 집약되어 있다. 이는 속도와 효율이 앞서는 이 시대에, 조금 느리고 힘들더라도 인내하며 올곧은 가치를 지키겠다는 단단한 선언이기도 하다.
생명을 지키는 일은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거나 대단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겸손히 숙이는 자세, 인고 끝에 낟알 하나를 발아시키는 시간의 무게를 아는 마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씨앗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책 속에서
내일 지구 종말이 와도, 농부는 볍씨를 뿌립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웠던 며칠 전날 밤, 저녁모임을 다녀오는 길에 당황스러운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흑미가 집 밖에서 눈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고, 새로 온 개가 흑미 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흑미에게 화를 냈습니다. 바보같이 맨날 양보하더니 밥도 집도 빼앗기고 왜 이러고 있냐고 말이죠. 눈을 맞으며 떨고 있는 흑미를 보고 속상한 마음에 혼은 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춥고 배고픈 생명들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1월_고요한 것들의 분주함」 중
올해도 장거리 비행을 대비해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야생 기러기 무리를 들녘에서 자주 만납니다. 기러기들이 이곳에 애써 찾아온 이유를 생각하며 현미 쌀 한 포대를 들녘에 뿌려주었습니다. 혹시나 다른 기러기 나그네 무리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허기를 달래려고 할 때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싶었거든요. 그저 멀리 가는 길 든든하게 먹고 무탈하게 비행하길 바랍니다.
-「3월_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말고」 중
완벽한 농사에 닿기엔 고려할 점들이 너무 많다. 햇볕이 충분이 들어야 하고, 논으로 드는 강물은 넉넉하고 깨끗해야 하며, 비는 충분히 내리되 가을엔 알곡이 여무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되고, 큰 바람이 몰아쳐도 안 된다. 병이 돌아서도 안 되고 해충이 들끓어도 안 되며 새들이 몰려와도 안 된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기에, 농부는 매일 논으로 나가 두 손을 모으고, 벼가 잘 자라도록 도움을 준다는 온갖 신들에게 빌고 또 빌어왔다. 지독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 대표는 이 사랑을 평생 놓지 않을 것이다.
-「물꼬와 둠벙, 벼가 아니라 사랑농사를 짓는군요」 중
아침 기운이 부쩍 선선해지며 농작물 잎마다 흰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가 백로입니다. 밤사이 내려앉은 이슬은 벼 이삭을 더 단단하게 여물게 하고, 들녘에는 어느새 황금빛이 번져갑니다. 섬진강을 따라 펼쳐진 논들은 여름 내내 품어온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묵직한 빛을 띱니다. 햇볕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들녘을 비추고, 바람에는 수확의 냄새가 실립니다. 농부는 고개 숙인 벼를 바라보며, 흘려보낸 계절과 다가올 겨울을 함께 떠올립니다.
-「9월_기대와 다를지라도 감사하기」 중
밀 농사는 처음이다 보니 평당 어느 정도의 씨앗을 뿌려야 할지, 거름은 어느 정도 해야 할지 몰라 내내 우왕좌왕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멍하게 밀밭을 바라보다가, 변변한 농기구도 없는 산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가꾸셨던 울 엄마 생각이 나더라고요. 어떻게 그 긴 세월 동안 홀로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많기도 많은 작물을 가꾸며 자식을 먹여 살렸을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11월_비로소 숨을 고릅니다」 중
AI도 중요하고 농사를 자동화하여 효율적으로 짓는 법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환호하기 전에,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부분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장 비판받아야 하는 건, 이 정도 왔으니 앞으로도 그냥 나와 내 가족과 내 회사만 잘 살면 된다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로 일관하면 하루하루 변화하며 나아가려는 걸음들을 묶거나 막아설 겁니다. 미래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천년 숲’도 오늘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물꼬와 둠벙, 천년 숲도 오늘부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