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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재고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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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한발
세상이 나를 오려낸다/ 나를 열어보고 싶은데 창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늘에 말라붙은 구름 오늘은 삼월입니다/ 내일보다 먼저 오는 것은 새벽입니다/ 벼락 맞은 소나무가 고개 숙여 인사합니다/ 과거는 쌀뜨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습니다/ 눈앞에 거리와 시간이 묻어서 뿌옇습니다/ 한 칸 띄어쓰기 된 사이도 있습니다/ 내가 싫증을 무릅쓰면 세상이 나를 싫증냅니다/ 마을이 나를 떨군 채 달아납니다/ 원래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 술이 뼈만 남게 됩니다

2부 두발
거울 앞에서 그대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서툰 칼질은 징검다리를 완성시킵니다/ 힘차게 못질하면 칠월이 아픕니다/ 내일의 나를 미리 구상하면 안 돼요/ 사랑은 약용 사람은 관상용/ 바닥을 치면 땅이 입을 벌려요/ 아이가 책을 펼 때 아이는 토끼 가죽을 폅니다/ 정지된 하늘에서 씨가 쏟아집니다/ 이 밤은 나를 솎아내지 못합니다/ 기침을 재고 처리하듯이 합니다/ 몸은 몸뿐인데 벽은 벽뿐이고/ 감정은 남지 못하고 여름만 남습니다

3부 고발
괴로운 나무들이 한 대씩 태웁니다/ 빤빤한 이마를 갖고 태어나 스스로 몸에 꼭 맞게 포장한 채 공기조차 드나들 수 없도록 혈액을 괴롭히다 멍투성이가 된 신념을 전파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번지지 않고 가면을 벗으니 평범한 맛뿐인 한 그릇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알알이 우박인데 먼 우주에서 보기엔 포말인 그 과일/ 기운 내라며 손 대신 털을 내미네요/ 또 말고 떠/ 당신 곁에선 바람도 익사합니다/ 이 진주의 이름은 파주입니다/ 시월의 속지/ 동쪽의 동족/ 미소가 덧칠될수록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강 건너지 못하는 강/ 햇살은 촛불이 아닌데 왜 까매지나요/ 푸념은 헤엄칠 때 유유히/ 입이 열리자 철새가 끓어오릅니다/ 한 사람의 검열 속에서 한 번 울어줍니다

4부 세발
부화하지 않고 않을 한마디/ 본성의 불씨를 구경합니다/ 수초가 통뼈를 두드리는데 와닿는 게 있을까요/ 한 가지와 셋이 다투면 될까요/ 눈먼 소음이 나만 공격합니다/ 꽃을 쥔다는 건 취득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자멸은 아프지 않을 수 있나요/ 긴 여정의 끝/ 우리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그쪽에 없나요/ 자유가 없어서 희망은 시한부입니다/ 혈연 자연 향연 다들 좋아하지 않나요

해설 | ‘우리’의 도래를 위한 서정의 가능성
| 김보경(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저자 : 이원하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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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세상이 나를 오려내려 한다

기분이다
나도
마흔 편의 시를 버린다
_「세상이 나를 오려내려 한다」 부분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는 총 4부 구성으로, 각 부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결기가 느껴진다. 먼저 1부 ‘한발’에서는 이원하의 서정성과 이번 시집이 내포하는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주변에 분진 날리는데/ 누가 계량한 분진인지/ 버스가/ 나를 못 보고 지나친다// 손바닥에 선명해진 바큇자국”(「나를 열어보고 싶은데 창문이 열리지 않습니다」)이라는 시구에서 서늘하게 드러나는 경계(境界)와 화자에게만 보이는 분명한 선(線)의 모습은, 이번 시집이 그 아슬아슬한 선을 바라보고 넘나들 것을 예견하게 한다.

2부 ‘두발’부터 본격적으로 분단 모티프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 편지에 적힌 소원을 이뤄주려/ 기록을 읽어내려”(「바닥을 치면/땅이 입을 벌려요」)간다는 화자의 태도와 의지는 목도하는 현실 앞에서 번번이 좌절된다. “저곳이/ 그때 그곳이 맞”는지 홀로 되묻고 “당신은 왜 이곳을 그리워하”(같은 시)느냐 묻는 화자는 현실의 풍경 앞에 점차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화자는 계속해서 좌절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곁눈질로 움켜쥐고 단념하지 말아야/ 하나쯤 되는”(「몸은 몸뿐인데 벽은 벽뿐이고」) 거라며 목격하고 또 기록하고자 다짐한 이 문제를 자꾸만 붙들고 경계 위에 발을 붙인다.

우리의 화해가 더디다고 생각되는데
개화 기간이 길수록
향이 진해진다고 믿습니다

이팝나무에 가득한
군모,
나 파주까지 왔습니다
_「한 칸 띄어쓰기 된 사이도 있습니다」 부분

3부 ‘고발’은 시집에서 가장 고조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이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시편들을 모았다. ‘만날 수 없는 사람’과 ‘갈 수 없는 곳’이 혼융되는 지점은 이원하의 이번 시집을 읽는 또하나의 열쇠이기도 하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결혼을 거행하는 남녀의 애달픈 가정사를 “괴로운 나무” “괴로운 새떼”(「괴로운 나무들이 한 대씩 태웁니다」)에 비유하거나, “눈물이 빽빽해집니다// 삼십 년째 수도꼭지가 놓아주지 않는/ 물줄기입니다”(「미소가 덧칠될수록 얼굴은 일그러집니다」)라는 시구에서 엿볼 수 있듯 이 부에서는 이원하만의 애틋한 서정을 자유로이 펼치며 이별을 노래한다.

4부 ‘세발’은 분단 현실의 구체적 면면을 시에 가져와 펼쳐 보인다. “내 뿌리인지도 모르면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뭘까”(「 우리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그쪽에 없나요」) 곱씹고, 위험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이제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여린 선언과도 같다. “피고 지는 연을/ 언제쯤 바라볼 것”(「혈연/자연/향연/다들 좋아하지 않나요」)인지, 결국 이 모든 것은 “한마디면 되지 않”(「부화하지 않고/않을 한마디」)겠는지 묻는 그의 애절한 질문은 외면이란 단어조차 과분한 적극적 무지의 상태인 분단 현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킬 것이다.

오봉산에 묘뿐인 것을 이해할 만큼
포기가 많아질 줄
파주에 발 담글 줄
알지 못했고
한때나마 꿈꾸었다는 사실이
무섭겠나요 자랑스럽겠나요

해답을 감추는
숭늉 같은 당신을
떠다 마시며 유추해봅니다
_「또 말고 떠」 부분

이원하의 시는 ‘문학(시)과 정치’라는 의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한국문학사의 오래된 논의를 다시 소환하며, 시를 통한 공동체 회복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 통일을 명시하지도, 특정 이념을 옹호하려는 목적하에 시라는 형식에 대한 고민을 방기하지도 않는다. 독특한 점은 앞서 언급한바 전통적인 형식으로서의 서정시의 형식을 취하거나 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_김보경, ‘해설’에서

평론가 김보경이 해설에서 밝혔듯, 이원하의 분단시가 ‘후세대 증언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번 시집에 뚜렷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전쟁이나 탈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를 통해 분단의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시인은 후세대로서 시를 통해 북한의 참상이나 탈북민의 현실을 대리해 증언하고자 한다. 물론 후세대 증언자로서의 위치성은 이중적이다. 이원하의 시 곳곳에서 시적 화자는 간접적인 경험의 주체라는 자기 위치를 인지한다. 전쟁이나 이산, 탈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당사자는 아니지만, 앞선 세대의 증언을 통해 이를 추체험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외부자도 아니기 때문이다.(‘해설’에서) 남과 북, 당사자와 외부자, ‘너’와 ‘나’라는 경계에서 이원하는 양쪽 모두를 지켜보는 파수꾼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렇게 서정과 참여를 오가며,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이 시대의 회복과 평화를 시로 꿈꾼다. 눈을 감고픈 현실과 눈을 감아야 보이는 당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 짙고도 너른 사랑을 노래하는 이원하의 순정에 다시 한번 흠뻑 매료될 시간이다.

◎ 이원하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오랜만에 시집으로 독자들을 찾아오셨는데요. 육 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출간하시는 소회를 간략히 부탁드리겠습니다.

→ 사실 두번째 시집은 더 일찍 출간될 수 있었어요. 부다페스트에 머물며 써둔 원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원고가 그대로 출간됐다면 독자분들을 훨씬 빠르게 만났을 거예요. 하지만 원고를 처음 읽어주신 분께서 출간에 제동을 거셨죠.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머물러 있던 저의 시세계를 넓혀주고 싶어하셨어요. 이후 새로운 원고를 완성하느라 출간이 늦어졌네요. 처음에는 출간이 늦어진다는 사실이 괴로웠지만, 지금은 시인으로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 사실이 기쁘기만 해요. 단호하게 제동 걸어주신 분을 은인이라 부르고 있답니다.

2. 이번 시집은 주로 남과 북, 그 경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요즘의 시,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소재인지라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분단시’를 이번 시집의 테마로 삼으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 그렇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있어요. 남들이 쓰지 않는 주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제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제로 시를 쓰지는 않아요. 머리에서 나온 시보다 가슴에서 나온 시를 더 좋아하는데요. 가슴에서 시가 나오려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시를 써야 하지요. 부다페스트에서 써온 원고를 출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위로를 받고 싶었어요. 그때 위로가 되어준 책은 저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책이었죠. 그 책에는 할아버지의 고향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어요. 훗날 통일이 되어 제가 북한에 가게 된다면, 할아버지 고향에 들러 소주 한 잔만 뿌려달라는 부탁이 제 가슴에서 시가 되었답니다.

3.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는 ‘제주’를 배경으로,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는 시의 공간을 ‘파주’로 설정해두셨습니다. 이렇듯 두 시집 모두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가장 주요한 요인이자 맥락은 ‘공간’이라고도 생각이 되는데요. ‘시적 공간’에 대한 선생님만의 철학이 있으실까요?

→ 낯선 공간에 혼자 놓였을 때 가장 할말이 많아져요. 할말이 많아야 시를 쓸 재료가 마련되지요. 일부러 낯선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우연히 낯선 공간에 놓이게도 돼요. 이런 상황은 저를 불편하게 만들지요. 제주에서의 작업도, 헝가리에서의 작업도, 파주에서의 작업도 전부 불편했어요. 도망치고 싶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지요. 그래서 할말이 많았고요.

4. 언제나 새롭고 독특한 시선으로 시를 쓰시는 만큼 시/시집을 읽는 선생님만의 방법이 궁금합니다.

→ 저는 다독하는 편이에요. 손에 잡히면 대부분 읽어보죠. 하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시집은 역시 글자로 그림을 그린 시집이에요. 황인찬 시인에게 시를 배울 때 가장 강하게 들었던 말이 글자로 그림을 그리라는 말이었어요. 그 말이 제 평생 취향이 되었네요. ‘시인에게 시를 배우고 있어요’라고 쓰는 것보다 ‘시인은 나를 손에 쥐고 연못에 던질지, 바다에 던질지 고민하네요’라고 쓰는 편이 훨씬 읽는 재미를 주지 않나요?

5.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다음 시집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세번째 시집은 어떤 곳으로 이동하게 될까요?

→ 시를 쓰게 만드는 대상은 제가 정할 수 있지만, 공간은 제 의지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운명이 저를 어디로 이끌지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에요. 대상은 이미 정해두었어요. 가장 한국적이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죠.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오늘 첫 만남을 가지러 떠난답니다.

■ 시인의 말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따르면
탈북민이
손에 꽃을 쥔다는 건

취득이 아니라
회복이다

2026년 4월
이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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