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표제작 「의심하세요」에서 의심과 믿음은 반대말이 아니라, 흔들리는 감정의 두 얼굴로 나타난다. 시인은 믿는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이 거미줄 치는 순간을 포착하고 “의심과 믿음은/ 어쩌면 같은 종족”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선택한 믿음은 “빛으로 지어진/ 누각 한 채”처럼 아름답지만 위태롭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의심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믿음을 지탱하는 감각이다. 오히려 무언가를 쉽게 믿지 않으려고, 더 튼튼히 믿으려고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때 확신의 언어를 벗어난 시는 오래 바라보는 언어가 된다.
믿지, 묻는다면
믿는다고 정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이 거미줄 친다
(…)
의심과 믿음은
어쩌면 같은 종족
_「의심하세요」
그리움,
무언가의 마지막을 오래 바라보는 마음
이 시집에서 죽음은 일상 속 사물과 감각으로 문득 드러난다. 맨홀, 소파, 냉동실, 시계, 전철역, 사탕, 고양이, 새 같은 사물과 존재 들은 평범한 풍경에 머물지 않고 무언가가 떠난 이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홀인원」에서 맨홀은 사람을 위한 구멍이면서 사람을 삼켜버리는 구멍이 되고, 「사탕 무덤」에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작품은 병들어 죽은 연인 혹은 먹을수록 사라지는 사랑의 형상으로 다시 읽힌다. 죽음은 설명되기보다 감각되고 애도는 선언되기보다 오래 씹히고 녹아든다.
당신이 죽자 나도 죽어버렸고 내가 죽어버려서 당신은 더욱 죽었으니 우리라는 붙이들의 죽음은 줄줄이 이어져 켜켜이 쌓이겠지
_「천개(天蓋)」
그렇기에 『의심하세요』의 그리움은 단순히 회상의 정서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시집의 그리움은 떠난 존재를 다시 붙잡으려는 마음이면서,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마음이다. 「천개(天蓋)」에서 화자는 “당신이 마침내 알아낸 것을” 들으려 하지만 “끝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구월은 당신이 태어난 달」에서는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우리들의 구원”이 되고, 「우리들에게 새는 영원히」에서는 믿는 순간 도망칠지도 모르는 새를 통해 사랑과 상실의 불안이 겹쳐진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것이 남긴 감각은 사물과 계절과 기억 속에 계속 떠돈다.
귤은 균이 되고 사탕은 뼈가 된다
부재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을 향하여
이 시집이 지닌 독특한 힘은 달콤하고 기괴한 감각의 결합에서 나온다. 「추락하는 거야? 날아가는 거야?」에서 귤은 상하면서 더 부드러워지며 끝내 균이 되고, 「쿠키맨」에서 따스하고 달콤한 것은 사랑과 다르지 않지만 결국 먹히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몸이다. 「녹아버리는 얼굴」에서 냉동실 속 소분된 살점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고 언 것은 녹으며 녹는 것은 망가진다. 이 시집의 사물들은 귀엽고 달콤한 표면을 지녔으나, 사탕이 뼈의 감각을 남기듯 그 안에는 허기, 상처, 부패, 죽음, 사랑의 불안이 함께 들어 있다. 고봉준 문학평론가가 해설에서 짚듯 이 시집에서 죽음은 가까운 사람에게만 닥치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삶과 일상에 “이미-항상” 놓여 있는 조건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죽음마저 ‘그대’의 죽음처럼 다가오는 순간 시집은 가장 사소하고 만만해 보이는 사물들에서 삶의 어두운 감각을 끌어낸다.
귤은 내가 되었다
균은 내가 되었다
여기 거대한 귤 하나
여기 거대한 균 하나
_?추락하는 거야? 날아가는 거야??
그러나 『의심하세요』의 세계가 무겁고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이상히 달콤하고 자주 불온하며 때로 우스꽝스럽고 끝내 서늘하다. 표지에 놓인 문장처럼 “어렵다는 말과/ 불가능하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이 시집은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의 자리에서 다시 묻고 다시 바라보고 다시 사랑하려는 시집이다. 사랑도 믿음도 애도도 삶도 어렵지만 어렵다는 사실이 곧 불가능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완전한 폐곡선”에 갇힌 듯한 세계에서 빠져나가려고 다시 의심하고 다시 감각한다. 의심은 닫힌 세계를 부수는 힘이면서, 닫힌 세계에 아직 남은 출구를 찾는 힘이다. 여기서 의심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믿음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은 부재와 그리움, 몸과 사물, 달콤함과 서늘함이 뒤섞인 자리에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각으로 남는다.
*시인의 말
물푸레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북유럽신화에서는 우주수로, 누군가에게는 회초리로 쓰인다는 이 나무는 어디에서 마지막을 살았을까요. 시집이 나올 무렵이면 동종의 나무마다 꽃을 피우겠지요. 이팝과 닮아 흔들리는 꽃송이를 몇 번이고 들여다볼 겁니다. 의심하면 곰곰이 바라보게 됩니다. 의심 없는 믿음은 허약한 것. 튼튼하게 믿고 싶어 기지의 것들을 의심합니다. 왁자한 말을, 어마한 사랑을, 만일의 믿음을 의심합니다. 기어이 의심까지 의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면 텅 빈 종이만 남을 텐데요. 이것이 마지막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