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통증이 올 때마다
너는 아마릴리스를 생각한다 했지
너의 앙상해진 굽은 뼈는
점점 대지의 구근을 향하고 있다
시인은 모란디를 생각하며 “목련꽃”(「문혜진의 편지」)을 떠올린다. 꽃이 필 때쯤, “우아하고 꼿꼿한 자태의 후광은 겨울을 지나온 침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 앉아 글을 쓰는 밤”(「대멸종 연대시의 밤」)이면 자궁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아이들이 찢고 나온 흉터”, “물고기 뼈처럼 휘어져 있는 켈로이드 흉터”. 물 고인 곳으로 “고래자리 별”이 쏟아지고, 고래자리 별은 “죽은 별들의 먼지 구름”을 다 마시고 있다. “인가와 군대, 감옥과 빌딩들을 천천히 삼킨다 천 개의 눈을 켜고, 어둠의 경계가 없어질 때까지, 어둠을 덧씌우며 몸부림치는 저 거대한 고래를 보라! 세상을 다 집어삼키고도 허기져 작은 눈을 부라리는 폭식증 환자”.(「고래」, 『질 나쁜 연애』) “흡,”(「홉스골」) “바이칼 호수”에 눈동자를 씻고, “달의 골수”를 마시고, “달빛”을 토해낸다. 호수가 출렁이는 이 밤, “나는 꼬리뼈가 아프다”.
여름은 붉은 꽃대의 “아마릴리스가 갈기를 세울 시간”(「아마릴리스」). 우리 등에서 터지는 골수의 비명을 여름이 찌를 시간. “실핏줄”(「아카시아 잎살이 아른거리는 오후」)이 다 터진 친구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아른거리며 투명한, 식물과도 같은 반짝임. 아기는 온몸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터뜨린다. 어둠을 벗기는 것은 “긴 동고비 울음소리”(「산목련」). 달빛이 조용히 우리의 숨결에 포개지는 순간, “이제 파도를 탈 시간이다”(「송정」). 여름은 “파도의 입을 더 더 벌리며”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세운다”. 시인은 “숨을 참”(「밤은 말한다」)고, “밀어젖”히고, “터뜨”리고, “부딪”치고, “말아올”리고, “뒤섞”이고, “참”고, “토해”내고, “게워”내고, “삼”키고, “삭”이고, “태”우고, “마침내 비운다”. 혼신을 다한 적막으로 숨구멍을 틔운다. “키르셰! 키르셰!”(「본」) 친구의 작은 아이가 하얀 발로 버찌를 밟으니 아스팔트에 “검붉은 과육”이 번진다. 시인은 기도한다. 그의 사랑도 기꺼이 다시 시작할 용기로 피어나기를, 이 막막한 고요 속에서 더 먼 곳을 품을 수 있는 깊고 그윽한 시선이 그에게 깃들기를.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고통 속에 혼자 있는 이들에게 이 시가 “창가에 내려앉은 목련의 빛깔이 되어 따뜻한 봄 인사를 건네주기를”(「문혜진의 편지」).
이 울음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해진 어둠의 솔기를 뜯어내는 저녁 비탈길에서, 절벽 돋아나는 잡초들 사이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어둠과 파도 사이 밤의 해안에서, 식지 않은 지층의 균열이 밀려올라와 가슴을 대륙처럼 들어올린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파도의 쇳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터져나와 몸을 찢고 거대한 울음으로 솟구친다 가슴을 텅텅 울리는 산비둘기 울음소리, 영원히 무너진 채 돋아나는 텅 빈 울음의 건축물, 뼈마디 마디마다 젖은 깃털이 돋고 폐를 쥐어짜듯 부풀었다 사그라지는 저 낮은 울음소리, 나는 이 울음을 지나 끝내 가슴을 가르는 칼날을 향해
아직 바닥에 닿지 못한 조약돌 하나가 내 늑골 사이 영원히 가라앉고 있다
_「가슴과 칼날 ―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부분
난다시편을 시작하며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1.
2025년 9월 5일 출판사 난다에서 시집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를 모아 묶었음에 ‘시편(詩篇)’이라 했거니와 시인의 ‘편지(便紙)’를 놓아 시집의 대미를 장식함에 시리즈를 그렇게 총칭하게도 되었습니다. 난다시편의 라인업이 어떻게 이어질까 물으시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경향이라 말을 아끼게 되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모든 말이 시의 언어로 발산될 수 있기에 시인에게 그 정신과 감각에 있어 다양함과 무한함과 극대화를 맘껏 넘겨주자는 초심은 울타리 없는 초원의 풀처럼 애초부터 연녹색으로 질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단호함은 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가 난다winged poems”입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무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벼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처럼 꽃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몸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처럼 희망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마음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온전히 시인의 목소리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을 빚어보자 하였습니다. 해설이나 발문을 통한 타인의 목소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하였습니다. 난다는 건 공중에 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말이니 여기 우리들 시를 거기 우리들 시로 그 거처를 옮김으로 언어적 경계를 넘어볼 수 있겠다는 또하나의 재미를 꿈꿔보자 하였습니다. 시집 끝에 한 편의 시를 왜 영어로 번역해서 넣었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시인의 시를 되도록 그와 같은 숨결로 호흡할 수 있게 최적격의 번역가를 찾았다는 부연을 왜 붙이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 두 가지 형태의 만듦새로 기획했습니다. 대중성을 담보로 한 일반 시집 외에 특별한 보너스로 유연성을 더한 미니 에디션 ‘더 쏙’을 동시에 선보입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이라 할 더 쏙. 7.5×11.5cm의 작은 사이즈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자랑하는 더 쏙은 ‘난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만큼 어디서든 꺼내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휴대용 시집으로 그만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단순히 작은 판형으로 줄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특별한 아트북을 염두하여 수작업을 거친 것이니 소장 가치를 주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건강하게 지저귀는 난다시편의 큰 새와 작은 새가 언제 어디서나 힘찬 날갯짓으로 여러분에게 날아들기를 바랍니다.